[NBA] 1988년 드래프트에서 지명된 선수들 스포츠

오랜만에 다시보는 드래프트에 관련된 포스팅입니다.....

80년대 드래프트에서는 매년 이후 리그의 레전드급으로 성장하는 슈퍼 플레이어들이 한 두명 이상씩은 꼭 포함되어있었지만 88년 드래프트에서는 레전드 급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긴 플레이어는 미치 리치몬드 정도를 제외하곤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위 픽에 지명된 선수들 중에는 이후 리그에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평균 이상의 능력을 보여준 선수들은 다수 보이네요......

우선 88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 지명된 선수들을 살펴보죠.....

순위-지명팀-이름-대학
1 LAC Danny Manning Kansas
2 Ind Rik Smits Marist

3 Phil Charles Smith Pittsburgh
4 NJ Chris Morris Auburn
5 GS Mitch Richmond Kansas State

6 LAC Hersey Hawkins Bradley
7 Phoe Tim Perry Temple
8 Char Rex Chapman Kentucky
9 Mia Rony Seikaly Syracuse
10 SA Willie Anderson Georgia
11 Chi Will PerdueVanderbilt
12 Wash Harvey Grant Oklahoma
13 Mil Jeff GrayerIowa State
14 Phoe Dan Majerle Central Michigan
15 Sea Gary Grant Michigan
16 Hous Derrick Chievous Missouri
17 Utah Eric Leckner Wyoming
18 Sac Rick Berry San Jose State
19 NY Rod Strickland DePaul
20 Mia Kevin Edwards DePaul
21 Port Mark Bryant Seton Hall
22 Clev Randolph Keys Southern Mississippi
23 Den Jerome Lane Pittsburgh
24 Bos Brian Shaw UC Santa Barbara
25 LAL David Rivers Notre Dame

대충 제 눈에 익은 선수들은 굵은 글씨로 나타냈고요.....그나마 1988년 드래프티들 중 유일하게 레전드 급 성적을 올린 미치 리치몬드는 빨간색으로 나타냈습니다.....(전성기 시절 리치몬드는 슈팅 가드 포지션에서 조던만큼의 강력한 득점력을 선보인 선수였으며 공격 뿐 아니라 수비에도 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선수였습니다. 물론 쇠퇴기가 빨리 찾아오면서 노쇠가 빨리 진행되어 커리어 후반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지만......어쨌거나 1988년 드래프티들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성적을 남긴 선수라는 생각이 들어 붉은 색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자아 그럼 지금부터 1라운드에 지명된 주요 선수들의 대략적인 커리어를 살펴보죠.

1라운드 1번 Danny Manning


명색이 1라운드 1번 픽 선수인데 변변한 믹스 동영상도 찾아보기 힘드네요.....간신히 니튜브에서 찾았는데 오디오는 빠져있는 파일입니다.......

매닝의 커리어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캔자스 대학 출신의 이 다재다능한 포워드/센터는 대학 시절 매직이나 안타깝게 사망한 렌 바이어스에 비견될 정도의 포스를 보여주었고 매닝을 중심으로한 캔자스 대학은 1988년 NCAA 우승을 거머쥐기도 하였습니다. 1라운드 1번 지명권을 거머쥔 클리퍼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닝을 지명하였습니다. 여기까지 그들의 선택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문제는 NBA에서의 매닝의 모습이었습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1번 픽 선수라고 보기에는 왠지 허전한......그의 데뷔 당시에만 해도 사람들은 그가 곧 리그를 주름잡는 선수가 되어 리그 판도를 뒤흔들 만큼의 임펙트를 보여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매닝의 커리어는 그저 준수한 수준으로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데뷔 시즌인 88-89시즌부터 매닝은 꼬이기 시작하는데요......26경기에만 출장하였습니다. 많은 경기를 결장하였지만 그는 26경기 동안 평균 36.5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9.4%, 평균 16.7득점, 6.6 리바운드, 3.1 어시스트, 1.7 스틸을 기록하며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두었지요. 하지만 89-90시즌, 90-91시즌에도 대략 평균 10경기 정도를 결장하였고 그 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성적은 평균 16.0득점, 6.0리바운드 정도였습니다. 네.....상당히 좋은 성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1번 픽 출신의 선수였고 대학 시절 그가 보여준 포스를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실망스러운 성적이었습니다.

92-93시즌에 매닝은 드디어 자신이 왜 1번 픽 선수인가를 보여주며 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시즌 매닝은 데뷔 이후 처음으로 82경기에 출장(선발 82경기)하여 평균 35.4분, 필드골 성공률 54.2%, 22.8득점(커리어 하이), 6.9리바운드, 3.5 어시스트. 1.6 스틸, 1.5 블락슛을 기록하며 드디어 팀의 에이스로 클리퍼스를 플옵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클리퍼스에서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보여준 것은 이 시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요.

93-94시즌 도중 팀은 트레이드를 통해 대니 매닝을 애틀랜타로 보냅니다. 이 시즌 대니 매닝은 클리퍼스와 애틀랜타에서 모두 68경기에 출장하였고, 평균 20.6득점(클리퍼스에서 42경기에 출장하여 23.7득점, 애틀랜타에서는 26경기 출장하여 15.7득점), 6.8리바운드, 3.8어시스트, 1.5 스틸, 1.2 블락슛을 기록하였습니다. 참고로 매닝이 한 시즌에 평균 20득점 이상을 기록한 것은 이 시즌이 마지막이었습니다.

94-95시즌 매닝은 바클리가 있는 피닉스 선즈로 옮기게 됩니다. 피닉스 역시 그에게 거는 기대는 컸지요. 허리 상태가 점차 악화되고 있었던 팀의 중심 바클리를 받쳐주며 바클리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때는 공격과 수비를 책임져주기를 바라며 피닉스는 그를 영입하였습니다. 하지만 94-95시즌 피닉스에서 매닝은 불과 46경기에 출장하였습니다. 물론 46경기 동아느 평균 32.8분을 블레이하며 17.9득점, 6.0 리바운드, 3.3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시즌의 거의 반을 날려먹은 것이지요. 그리고 95-96시즌에는 전 시즌보다 더 많은 49경기에 결장하였습니다. 평균 득점은 데뷔 이후 최악인 13.4득점, 리바운드 역시 4.3개로 대뷔 이후 최악이었지요. 악화되는 몸상태를 참아가며 71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23.2득점으로 분투한 바클리가 불쌍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바클리는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우승 반지를 위해 드렉슬러와 올라주원이 있는 휴스턴으로 팀을 옮깁니다.

96-97시즌과 97-98시즌에는 70경기 이상을 출장하였습니다만 이미 그의 기량은 정점을 찍고 확연한 하향세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96-97시즌에는 77경기 출장(이중 선발 17경기), 평균 27.7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53.6%, 평균 13.5득점, 6.1 리바운드를 기록하였고, 97-98시즌에는 70경기 출장(이중 선발 11경기), 평균 25.6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51.6%, 평균 13.5득점, 5.6리바운드를 기록하였습니다. 선발 출장 경기 수도 적고 플레이 타임도 25분 전후로 낮아지며 이제 그는 베테랑 식스맨 정도의 위치로 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단축 시즌으로 치루어진 98-99시즌에 평균 9.1득점, 4.4 리바운드를 기록한 매닝은 99-00시즌 밀워키, 00-01시즌 유타, 01-02시즌 댈러스, 02-03시즌 디트로이트로 매해 팀을 옮겨다니는 저니맨 신세가 되었고, 02-03 시즌 디트로이트에서의 생활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였습니다.

통산 성적은 883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27.4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51.1%, 평균 14.0득점(12367득점), 5.2리바운드(4615리바운드), 2.3 어시스트(2063), 1.1 스틸(1000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네....이 정도만 써 놓으면 그래도 준수한 커리어를 보냈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1라운드 1번 선수였습니다. 84년 1번 픽 올라주원, 85년 1번 픽 유힝, 86년 1번 픽 브래드 도허티, 87년 1번 픽 데이비드 로빈슨.....이들에 비하면 88년 1번 픽인 대니 매닝은 그저 평범한 커리어를 보여준 것 밖에 없으며 커리어 기간 중 강력한 임펙트를 심어준 적도 없는 선수였습니다.......1번 픽이 아니라 10번 픽 이후에 지명된 선수라면 나름 훌륭한 커리어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쩝......1번 픽 출신으로는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드는 안타까운 선수입니다......


1라운드 2번 Rik Smits


클리퍼스에 이어 1라운드 2번 픽을 가지고 있었던 인디애나는 아주 좋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87년 드래프트에서 팀의 득점과 외곽슛을 책임질 수 있는 뛰어난 슛터인 레지 밀러를 지명했던 인디애나는 1라운드 2번 픽으로 허약한 골밑을 보강하기 위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요. 그 결과 네덜란드 출신으로 224cm의 큰 신장을 자랑하는 릭 스미치를 선택합니다.

물론 인디애나의 선택에서 위험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스미츠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1984년에 미국으로 건너왔고 농구 역시 대학에 들어온 이후부터 시작했으니까요......구력이 짧다.....이 정도이겠지요. 하지만 대학 시절 릭 스미츠는 이미 큰 신장을 제대로 이용하며 포스트 업, 미들슛, 훅슛 등 다양한 공격 패턴을 보유한 재능있는 센터로 빠르게 성장하였었습니다. 대학 4년 간 그의 평균 득점과 리바운드는 18.2득점, 7.6 리바운드였으니까요.

당시 NBA가 패트릭 유잉, 하킴 올라주원과 같은 강력한 센터들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점이었고 89-90시즌에 나타나게될 데이비드 로빈슨까지 생각한다면 골밑을 책임져줄 든든한 센터 없이는 리그에서 경쟁력을 가자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습니다.(물론 시카고의 그분은 달랐지요.....흐음)

팀은 당시 주전 센터였던 Steve Stipanovich의 백업으로 릭 스미츠를 활용하며 장기적으로 그를 키우려고 했지만 87-88시즌 직후 급작스런 부상으로 Stipanovich가 은퇴를 하게 되면서 릭 스미츠는 데뷔 첫해부터 인디애나의 주전 센터로 기용되었습니다. 데뷔 시즌인 88-89시즌 스미츠는 82경기에 출장(이중 선발 71경기), 평균 24.9분, 필드골 성공률 51.7%, 11.7득점, 6.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냅니다. 물론 올라주원이나 유잉과 같은 압도적인 모습을 데뷔 시즌부터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출장 시간이 25분 미만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훌륭한 성적이 아니었나 싶네요.

그리고 2년차인 89-90시즌, 스미츠는 2년차 징크스 따위는 겪지 않고 전년도에 비해 향상된 평균 15.5득점, 6.2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주전센터로서는 손색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참고로 이 시즌, 스미츠는 82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하여, 평균 29.3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은 53.3%를 기록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체력적인 측면에는 조금 약한 모습이 보이네요. 참고로 커리어 12년 동안 그가 평균 30분 이상을 소화한 시즌은 두 시즌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장신이지만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스피드와 운동 능력, 그리고 체력적인 문제로 인해 한 경기에 30분 이상을 소화하기 힘들다는 단점이 뚜렷한 선수이지만, 코트에 있는 동안에 그가 보여준 득점력과 리바운드 능력은 자칫 레지 밀러 중심의 궁병대가 될 수도 있었던 인디애나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물론 그와 함께 터프하게 골밑을 지켰던 데이비스 형제의 존재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페이서스가 동부의 강호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던 90년대 중반에 릭 스미츠 역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94-95시즌부터 96-97시즌, 세시즌 동안 스미츠는 +17득점, +6.9 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하며 명센터들이 호령했던 당시의 NBA에서 인디애나의 골밑을 사수하였습니다. 이후에도 꾸준히 15득점 전후의 득점력과, 5-6개 정도의 리바운드를 꾸준히 걷어내며 그는 꾸준히 인디애나의 골밑에서 버텨주었습니다.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었던 99-00시즌에도 릭 스미치는 79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평균 23.4분을 소화, 12.9득점, 5.1 리바운드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평균 20분 정도를 소화하였을 때 그는 분명 경쟁력있는 센터였지만, 시즌 종료 후 팀과 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페이서스의 리빌딩을 위해 스스로 은퇴를 하는 과감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통산 성적은 867경기에 출장, 평균 26.6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50.7%, 14.8득점(12871득점), 6.1리바운드(5277리바운드), 1.4 어시스트1215어시스트), 1.2 블락슛(1111블락슛)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88년 드래프트 1번 픽인 대니 매닝에 비해 세 시즌을 덜 뛰었지만, 통산 경기 출장 수에서는 불과 16경기 적을 뿐이었습니다. 매닝에 비해 더 적은 플레이타임을 소화하였지만 통산 득점에서는 500득점 정도를 더 해주었고, 리바운드에서도 600개 정도를 더 잡아준 선수이지요......(이렇게 놓고 보니 정말 매닝은......)

1라운드 3번 Charles Smith
88년 드래프트에서 3번으로 지명된 선수는 바로 찰스 스미스입니다. 불스와 닉스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처음 보았던 선수인데요. 피츠버그 대학 출신으로 준수한 득점력으로 좋은 평가를 들었던 선수입니다. 자아....문제는 여기서 클리퍼스의 대삽질이 시작된다는 것인데요. 찰스 스미스는 88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번 픽으로 필라델피아에 지명되었습니다. 1라운드 6번 픽을 가지고 있었던 클리퍼스는 자신들이 지명한 허쉬 호킨스를 필라델피아로 보내고 찰스 스미스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찰스 스미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87-88시즌 14.5득점, 13.0리바운드로 리바운드 타이틀을 따낸 마이클 케이지를 포기하는 승부스를 던집니다. 그런데....이게 결과적으로......

분명 찰스 스미스는 좋은 재능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208cm, 110kg의 스미스는 케이지에 비해 사이즈가 큰 파워 포워드였으며, 포스트와 미들라인에서의 득점이 가능한 선수였기에 클리퍼스는 리바운더인 케이지와 외곽슈터인 호킨스에 비해 훨씬 더 효율성이 큰 선수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클리퍼스에서 찰스 스미스에게 요구하였던 것은 스미스가 호킨스와 케이지의 몫을 동시에 해주기를 바랐던 것이 아닌가 싶은......(이제 데뷔하는 루키에게 무슨 이런 기대를......솔직히 그 정도의 기대를 받을 정도의 임펙트가 스미스에게 있지도 않았는데....쩝......)

자아....이런 과정을 거쳐 찰스 스미스는 88-89시즌, 클리퍼스에서 자신의 데뷔 시즌을 치르게 됩니다. 데뷔 시즌 그의 성적은 71경기에 출장(이중 선발 56경기), 평균 30.4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9.5%, 평균 16.3득점, 6.5 리바운드를 기록하였습니다. 네....루키로서는 상당히 좋은 성적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그러면 이 시즌에 스미스의 영입으로 인해 클리퍼스의 유니폼을 입지 못한 호킨스와 시애틀로 팀을 옮긴 케이징의 성적을 살펴볼까요? 우선 마이클 케이지는 88-89시즌 시애틀에서 80경기에 출장(이 중 선발 71경기), 평균 10.3득점, 9.6리바운드를 기록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클리퍼스의 선택이 아주 틀렸다고는 볼 수 없는데요......문제는 스미스와 유니폼을 바꿔입은 호킨스입니다. 88-89시즌 호킨스의 성적은 79경기에 출장(모두 선발), 평균 32.6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5.5%, 3점슛 성공률 42.8%, 평균 15.1 득점, 2.8리바운드, 3.0어시스트, 1.5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즉 만약 스미스와 호킨스를 맞바꾸지 않고 케이지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클리퍼스는 오히려 골밑에서 평균 10개 정도의 리바운드를 걷어올릴 수 있는 강력한 리바운더와 40% 이상의 성공률로 무장한 준수한 외곽 슛터를 동시에 보유할 수 있었고, 1라운드 1번으로 지명한 매닝까지 생각한다면 오히려 더 나은 팀을 꾸릴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점에서 찰스 스미스가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해도 클리퍼스가 그를 호킨스와 케이지 대신 선택한 것은 88년 드래프트 최악의 계산 착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88-89시즌 이후 스미스는 91-92시즌까지 세시즌 더 클리퍼스에서 플레이를 하였고, 89-90시즌과 90-91시즌에는 평균 21.1득점, 평균 20득점을 기록하며 득점력이 강한 포워드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특히 90-91시즌에는 평균 20.0득점, 8.2 리바운드라는 커리어 하이 시즌을 기록하며 그나마 클리퍼스의 아픈 속을 달래주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이후 찰스 스미스는 임펙트 있는 시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91-92시즌, 시즌 절반 정도를 날려먹고 평균 14.6득점을 기록한 찰스 스미스는 92-93시즌 뉴욕 닉스로 팀을 옮겨 패트릭 유잉, 찰스 오클리와 함께 닉스의 골밑을 사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컨퍼런스 결승에서 불스를 상대로도 분전하였지만 그의 성적은 클리퍼스 시절과는 조금 거리가 먼 것이었지요. 94-95시즌까지 그래도 평균 12득점 정도를 해주다가 95-96시즌부터 급속도로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95-96시즌 도중 샌안토니오로 팀을 옮긴 스미스는 96-97시즌 한해 샌안토니오에서 더 플레이한 후 은퇴를 하게 됩니다.

통산 성적은 커리어 8년 동안 564경기에 출장, 평균 29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7.5%, 평균 14.4득점(8107득점), 5.8리바운드(3246리바운드), 1.4 어시스트(798어시스트), 1.4 블락슛(789블락슛)을 기록하였습니다. 커리어 자체도 짧았고 데뷔 이후 두번째, 세번째 시즌에 보여준 불꽃을 제외하면 그리 눈에 띄는 시즌없이 평범하게 커리어를 마감한 선수이지요.

1라운드 4번 Chris Morris


1라운드 4번은 뉴저지 네츠에 지명된 크리스 모리스입니다......80년대 드래프트에서 그리 큰 재미를 보지 못했던 뉴저지는 88년 드래프트 1라운드 4번 지명권을 바클리가 나온 오번 대학의 크리스 모리스에게 던졌지요.....203cm, 103kg의 체격은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는 충분히 경쟁력을 갖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리스는 커리어 11년 동안 나름 성실한 플레이로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아간 선수 중 한명이었지만......결과적으로 1라운드 4번이라는 상위 픽에 걸맞는 활약을 보여준 적은 없기에 아쉬움이 남는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특히 모리스 다음의 5번 픽이 미치 리치몬드였다는 점에서 더욱 더 아쉬움이 큰 선택이지요......

루키 시즌이 88-89시즌 크리스 모리스는 76경기에 출장(선발 48경기), 평균 27.6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5.7%, 평균 14.1득점, 5.2리바운드, 5.2 리바운드, 1.6어시스트, 1.3 스틸을 기록하며 출장 시간 대비 훌륭한 성적을 올렸습니다. 특히 3점슛 성공률도 36.6%를 기록하여 외곽에서의 능력도 보여주었지요. 여기까지만 해도 네츠의 선택은 굿 초이스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여세를 몰아 모리스는 2년 차인 89-90시즌, 네츠의 주전 포워드 자리를 꿰차며 80경기에 출장, 평균 30.6분을 소화하며, 평균 14.8득점, 5,3 리바운드, 1.8 어시스트, 1.6 스틸을 기록, 루키 시즌과 비교하여 모든 면에서 향상된 능력을 보여주었지요......문제는 여기까지였다는 것입니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커리어 마지막 해인 98-99시즌까지 모리스가 평균 14득점 이상을 기록한 시즌은 92-93 시즌 밖에 없습니다. 대부분 평균 10득점~13득점 정도를 기록하였고, 5개 이상 꾸준히 잡아주던 리바운드도 94-95시즌을 마지막으로(평균 5.7개) 4개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지요. 괜찮은 식스맨 정도, 그리고 주전이 쓰러졌을때 그 자리를 그럭저럭 메꾸어줄 수 있는 선수이긴 하였지만 1라운드 4번 픽을 던질 정도의 활약은 결코 보여주지 못했지요.....

모리스 뒤에 지명된 리치몬드, 호킨스를 생각한다면 네츠는 두고 두고 후회할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라운드 5번 Mitch Richmond

1라운드 5번은 골든 스테이트에 지명된 미치 리치몬드입니다.....

90년대 매시즌 20득점이 넘는 득점력과 정확한 외곽슛, 그리고 196cm의 신장은 작았으나 100kg에 이르는 탄탄한 체격을 바탕으로 수비에서도 상대 에이스 플레이어를 저지하는 수준급 디팬스를 보여준 90년대의 대표적인 슛팅가드이고, 동시에 88년 드래프티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레전드 급의 기록을 남긴 유일한 선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네요......(1라운드 1~4번 픽을 가진 팀들은 도대체 뭘 한 것인지.....하아....) 어쨌건 1라운드 2번 픽을 가진 인디애나를 제외하면 나머지 팀들이 삽을 푸는 바람에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는 미치 리치몬드를 지명하는데 성공하였고 85년 드래프트에서 건진 크리스 멀린과 함께 강력한 외곽 공격력을 갖추게 됩니다.(골든 스테이트는 89년 드래프트에서 팀 하더웨이를 지명하는데 성공하여 Run-TMC를 완성하게 되죠)

리치몬드는 데뷔 시즌은 88-89시즌이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화려한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크리스 멀린과 함께 골든스테이트의 공격을 분담한 리치몬드는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79경기 출장(모두 선발), 평균 34.4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6.8%, 3점슛 성공률 35.7%, 평균 22.0득점, 5.9리바운드, 4.2 어시스트, 1.0 스틸을 기록하며 데뷔 시즌부터 리그에 엄청난 충격을 몰고오게 됩니다. 당연히 88-89시즌 신인왕은 리치몬드였지요. 그리고 All-Rookie First Team에도 선정되며 자신의 화려한 커리어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데뷔 2번째 시즌은 89-90시즌에는 킬러 크로스 오버라고 불릴 정도의 드리블 능력과 함께 강력한 슛팅력을 보유한 팀 하더웨이가 합류하여 리그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온 골든 스테이트의 공격 농구에 한 축을 담당하였습니다. 두번째 시즌에도 78경기 출장하여 평균 35.9분, 필드골 성공률 49.7%, 3점슛 성공률 35.8%, 평균 22.1득점, 4.6리바운드, 2.9 어시스트, 1.3 스틸을 기록하며 데뷔 시즌의 자신의 실력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였죠. 90-91 시즌에도 리치몬드는 77경기에 출장, 평균 23.9득점, 5.9리바운드, 3.1 어시스트, 1.6 스틸을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스코어러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하지만 골든 스테이트에서의 생활은 여기까지, 91-92 시즌 직전에 팀은 리치몬드를 새크라멘토로 트레이드하게 됩니다. 당시 새크라멘토의 전력은 플옵 진출을 하기에는 상당히 거리가 먼.....한마디로 약체팀이었지만 리치몬드는 바뀐 환경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폭발시킵니다. 91-92시즌에 리치몬드는 80경기에 출장, 평균 38.7분,필드골 성공률 46.8%, 3점슛 성공률 38.4%, 평균 22.5득점, 4.0리바운드, 5.1 어시슽, 1.2 스틸을 기록하며 공수에서 팀을 든든히 받치는 에이스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후에도 리치몬드는 +20득점, 3~4개의 리바운드, 4개 이상의 어시스트, 1개 이상의 스틸을 기록하며 조던에 비견될 만큼의 강력한 스코어러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되죠. 특히 96-97시즌은 리치몬드의 커리어 하이 시즌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활약을 펼치는데요. 이 시즌 리치몬드는 81경기에 출장, 평균 38.6분을 소화하며, 평균 25.9득점, 3.9리바운드, 4.2 어시스트, 1.5 스틸을 기록하며 상대팀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NBA All Second Team에도 선정되었지요. 97-98시즌에도 평균 23.2득점을 기록한 리치몬드는 시즌 종료와 동시에 워싱턴으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이 시즌까지 리치몬드는 10시즌 연속 +21득점을 기록하였는데, 이 기록은 리그 역사상 오스카 로버트슨, 카림 압둘자바, 마이클 조단, 그리고 리치몬드까지 해서 단 네명만이 보유하고 있는 위대한 기록입니다.

하지만 워싱턴 이적 이후 리치몬드의 득점력은 서서히 내리막을 걷기 시작합니다. 연봉문제로 인해 구단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리치몬드는 워싱턴에서의 세시즌 동안 평균 19.7득점-17.4득점-16.2 득점으로 점차 내리막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워싱턴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00-01시즌에는 부상으로 37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습니다. 결국 시즌 종료와 함께 리치몬드는 LA 레이커스트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데뷔 14년차로 노장이 되어버린 리치몬드, 그리고 레이커스에는 이미 리그 최정상급의 슈팅 가드인 코비 브라이언트가 있었고 동시에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샤킬도 있었습니다. 리치몬드는 팀의 에이스가 아니라 백업 슛팅 가드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01-02 시즌, 64경기에 출장(이중 선발은 두 경기), 평균 11.1분을 소화하며, 평균 4.1득점, 1.5리바운드, 0.9어시스트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팀은 파이널에서 우승, 리치몬드는 마지막 순간에 챔피언 반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지요. 하지만 이미 노쇠한 자신의 몸으로 더 이상의 정상적 플레이를 소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리치몬드는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화려했던 14시즌 동안의 커리어를 마감하게 됩니다.

통산 성적은 976경기에 출장, 평균 35.2분을 소화하였고(커리어 마지막 시즌인 01-02시즌을 제외하고 리치몬드가 평균 30분 이하를 플레이한 시즌은 없었습니다.), 필드골 성공률 45.5%, 3점슛 성공률 38.8%, 평균 21.0득점(20497득점), 3.9리바운드(3801리바운드), 3.5어시스트(3398어시스트), 1.2 스틸(1211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주요 경력으로는 1번의 NBA 챔피언(2002), 6번의 올스타, 1번의 올스타전 MVP(1995년, 23분간 22득점), 3번의 All NBA Second Team(94, 95, 97), 2번의 All NBA Third Team(96, 98), 89년 신인상, 89년 NBA All-Rookie First Team, 88년 서울 올림픽 동메달, 96년 애틀란타 올림픽 금메달입니다.

커리어 14시즌 동안 플레이오프에는 네 번 밖에 진출하지 못하였는데, 그의 전성기 시절 대부분을 약체인 새크라멘토에서 보낸 탓이 크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워싱턴에서의 세 시즌 동안은 팀도 약체였고 연봉 문제로 인한 구단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팀웍에도 문제가 있었던 선수였지요.

커리어 기간 동안 그 자신이 보여준 플레이와 역량에 비해 종종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까운 선수 중 한명입니다.

1라운드 6번 Hersey Hawkins

1라운드 6번은 허쉬 호킨스입니다. 191cm의 단신 슈팅 가드이지만 1988년 NCA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득점력과 정확한 외곽슛을 보유한 선수이지요.....(니튜브와 구글을 뒤져보았지만 쓸만한 영상이나 사진이 없어 아쉽습니다. 개인적으로 시카고와 시애틀의 파이널에서 자신보다 큰 조던을 사력을 다해 막던 모습이 인상적인 선수였습니다.....)

1라운드 3번으로 지명된 찰스 스미스에 관한 내용에서 잠시 언급하였는데, 호킨스는 1라운드 6번으로 클리퍼스에 지명되자마자 1라운드 3번으로 필라델피아에 지명된 찰스 스미스와 유니폼을 바꿔입게 됩니다.....필라델피아 입장에서는 이것이 대박이었는데요.

호킨스는 루키 시즌인 88-89시즌, 79경기에 출장하여(모두 선발), 평균 32.6분, 필드골 성공률 45.5%, 3점슛 성공률 42.8%, 평균 15.1득점, 2.8리바운드, 3.0어시스트, 1.5 스틸을 기록하며 당당히 필라델피아의 주전 슈팅 가드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두번째 시즌인 89-89시즌에 그의 기량은 더욱 좋아져서, 82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 평균 34.8분, 필드골 성공률 46%, 3점슛 성공률 42%, 평균 18.5득점, 3.7리바운드, 3.2 어시스트, 1.6 스틸을 기록, 데뷔 시즌에 비해 공수 양면에서의 모든 기록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세번째 시즌인 90-91시즌에는 80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22.1득점, 3.9리바운드, 3.7어시스트, 2.2 스틸로 에이스급 슈팅 가드의 포스를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호킨스는 필라델피아에서 두시즌을 더 뛰며, 평균 19.0득점, 평균 20.3득점을 기록하였고 3점 슛 성공률 역시 40% 이상을 기록하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다섯 시즌을 보낸 호킨스는 93-94시즌에 샬럿 호네츠로 팀을 옮깁니다. 하지만 샬럿은 신생팀 답지 않게 이미 레리 존슨과 알론조 모닝이라는 확실한 에이스들을 보유하고 있는 팀이었고, 공격에서의 호킨스의 비중은 필라델피아 시절에 비해서는 낮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샬롯에서의 두 시즌 동안 한 경기의 결장도 없이 164경기를 소화하였고, 평균 플레이 타임도 33분 정도를 소화해주며 팀의 핵심 멤버로 자리를 지켰고, 득점 역시 알론조 모닝과 레리 존슨을 백업하며 평균 14득점 이상을 해주며 건실한 슈팅 가드로서 리그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합니다.

95-96시즌에는 다시 시애틀로 팀을 옮겨 네 시즌을 소화하였습니다. 이 네시즌 동안 호킨스가 결장한 경기는 단 한경기도 없었습니다. 그정도로 호킨스의 자기 관리 능력은 탁월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샬럿과 마찬가지로 시애틀은 게리 페이튼과 숀 캠프로 이어지는 확실한 원투 펀치가 있었고 호킨스의 역할은 역시 공격에서 이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정도의 역할이었습니다. 95-96시즌과 96-97시즌에는 +14득점에 46%를 상회하는 3점슛을 앞세워 시애틀의 외곽 공격을 확실히 책임지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97-98시즌을 기점으로 호킨스는 급격한 하향세를 그리게 됩니다. 82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장한 호킨스는 데뷔 이후 가장 낮은 평균 득점인 10.5득점을 기록하였습니다. 3점슛 성공률은 44%로 여전히 높은 성공률을 유지하였지만 득점력의 하락은 이 시즌에 눈에 띄게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결국 데뷔 이후 97-98시즌까지 모두 선발로만 경기에 출장하였던 호킨스는 단축 시즌으로 치루어진 98-99 시즌에 50경기 중 16경기에 식스맨으로 출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즌 평균 득점은 10.3 득점으로 전 시즌에 비해 약간 더 낮아졌습니다. 결국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호킨스는 시애틀을 떠나게 되었고, 99-00시즌 시작과 함께 시카고 불스에서 플레이를 하게 됩니다. 이 시즌부터 호킨스의 하향세는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단축 시즌인 98-99시즌을 제외하고 항상 79경기 이상을 소화하였더 호킨스는 99-00시즌에는 61경기 출장에 그쳤습니다. 플레이 타임 역시 데뷔 이후 처음으로 30분 미만인 26.6분을 기록하였고, 평균 득점은 7.9득점, 3점슛 성공률 역시 데뷔 이후 최악인 30.6%를 기록하며 이젠 더 이상 리그에서 버틸 수 있는 역량에 한계가 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00-01시즌, 예전에 자신이 뛰었던 샬롯으로 복귀하여 59경기에 교체로만 출장하여 평균 3.1득점, 1.4리바운드, 1.2 어시스트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긴채 자신의 커리어를 마감하였습니다.

통산 성적은 커리어 13년 동안 983경기에 출장, 평균 32. 6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46.1%, 3점슛 성공률 39.4%, 평균 14.7득점(14470득점), 3.6리바운드(3554리바운드), 2.9어시스트(2860어시스트), 1.6 스틸(1622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뭐....뚜렷하게 나타나는 기록은 없습니다. 40%에 육박하는 3점슛 성공률 정도? 네....이 선수의 가장 큰 무기는 3점슛이었습니다. 그는 커리어 13시즌 동안 모두 1226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는데 이것은 리그 역사상 25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참고로 앞에서 언급하였던 리치몬드는 통산 1326개의 3점슛을 성공시켜 13위에 올라있습니다. 1위는 다 아시죠? 바로 불꽃남자 레지 밀러.....2560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습니다.)
 
1라운드 7번은 피닉스에 지명된 팀 페리인데.....그야 말로 최악의 선수였습니다. 피닉스는 1라운드 7번 픽을 템플 대학 출신의 포워드인 팀 페리에게 행사하였지만 그는 단지 일곱 시즌을 리그에서 플레이했을 뿐이고, 그 기간 중 커리어 하이 시즌에 해당하는 기록이 12.3득점, 6.9 리바운드 였습니다. 통산 성적은 6.8득점, 4.0 리바운드입니다. 88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지명된 선수 중 가장 최악 중의 한명이 바로 팀 페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1라운드 8번 Rex Chapman



1라운드 8번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샬롯 호네츠는 켄터키 대학 출신의 슈팅 가드인 렉스 채프먼을 지명합니다. 켄터키 대학에서 2년간 평균 17.6득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득점 감각을 보인 이  백인 슛터에게 샬롯 호네츠는 역사상 그들의 최초 신인 지명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물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렉스 채프먼을 지명하며 구단은 호네츠 역사상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얻게 되었으니까요.

루키 시즌인 88-89시즌, 채프먼은 팀과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였습니다. 75경기에 출장(이중 선발 44경기), 필드골 성공률 41.4%, 3점슛 성공률 31.4%, 평균 29.6분을 소화하며, 16.9득점, 2.5리바운드, 2.3 어시스트, 0.9 스틸을 기록하며 단숨에 신생팀인 샬럿 호네츠의 에이스로 군림하게 되지요.

두번째 시즌인 89-90시즌에는 54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2.6분을 소화, 필드골 성공률 40.8%, 3점슛 성공률 33.1%, 평균 17.6득점, 3.3 리바운드, 2.4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루키 시즌에 비해 더욱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90-91시즌에도 70경기에 출장하며 평균 15.7득점을 기록하며 호네츠의 득점을 이끌었지요. 하지만 호네츠와 채프먼의 행복한 관계는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끝나게 됩니다. 1991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번 픽을 획득한 호네츠는 네바다 대학에서 NCAA 최고의 플레이어로 군림하였던 레리 존슨을 지명하였고, 호네츠는 레리 존슨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채프먼은 이 시즌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였고 기량 역시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91-92 시즌 도중 호네츠 최초의 프랜차이즈인 렉스 채프먼은 워싱턴으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워싱턴 이적 후 부상으로 한경기에만 출장한 렉스 채프먼은 92-93시즌, 부상에서 회복 60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21.7분을 플레이하였습니다. 필드골 성공률 47.7%, 3점슛 성공률 37.1%, 평균 12.5득점, 1.5 리바운드, 1.9 어시스트를 기록합니다. 부상에서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채프먼은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가장 큰 무기였던 운동 능력을 상실하였죠.(채프먼은 단신의 백인 슈팅 가드이기에 3점 슛터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대학과 호네츠 시절의 채프먼은 오히려 스피드와 운동 능력을 앞세워 돌파를 주로 하는 공격을 선호하였습니다.) 하지만 채프먼은 여기서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공격 스타일에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전형적인 점프 슈터로서의 변화였지요. 그 결과 채프먼은 한물 갔다는 평가를 뒤로 한채 93-94 시즌, 평균 18.2득점, 2.4 리바운드, 3.1 어시스트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게 됩니다. 94-95 시즌에도 평균 16.2득점으로 변함없은 득점력을 보여준 채프먼은 95-96시즌 마이애미를 거쳐 96-97시즌, 자신의 커리어를 마감하게될 피닉스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때부터 채프먼은 평균 35% 정도의 정확한 3점 슛을 앞세워 결정적인 순간에 클러치 슈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강한 임펙트를 심어줍니다. 호네츠 시절에 비해 득점력은 하락하였지만 확률높은 3점슛과 승부처에서의 과감한 플레이는 너무나 훌륭하였지요. 특히 97-98시즌에는 3점슛 성공률 38.6%, 평균 15.9득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통산 성적은 커리어 12년 동안 666경기에 출장, 평균 29.3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3.0%, 3점슛 성공률 35.0%, 평균 14.6득점(9731득점), 2.5 리바운드(1645리바운드), 2.7어시스트(1798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1라운드 9번 Rony Seikaly

1라운드 9번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마이애미는 시라큐스 대학 출신의 백인 센터 Rony Seikaly를 지명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슈퍼 플레이어들이 눈에 띄지 않았던 88년 드래프트에서 세이커리의 지명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211cm, 114.8kg의 센터로서는 괜찮은 체격 조건과 함께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에서의 득점력과 리바운더로서의 능력도 훌륭한 괜찮은 센터였습니다.

루키 시즌이었던 88-89시즌에 78경기 출장(이 중 62경기 선발), 평균 25.2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4.8%, 평균 10.9득점, 7.0리바운드, 1.2 블락슛을 기록하며 센터로서 괜찮은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두번째 시즌인 89-90시즌부터 세이커리의 잠재력이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즌 세이커리는 74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2.6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50.2%, 평균 16.6득점, 10.4리바운드, 1.7 블락슛을 기록하며 +15득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하며 리그 A급 센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즌 기량 발전상(MIP)를 수상하기도 하였지요. 세이커리는 93-94시즌까지 마이애미에서 플레이하며 매시즌 +15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모닝 등장 이전까지 마이애미의 든든한 기둥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100% 소화해주었습니다.(가장 좋았던 시즌은 92-93시즌으로 평균 17.1득점, 11.8리바운드를 기록하였습니다.)

94-95시즌부터 두 시즌 동안은 골든 스테이트에서 플레이를 했는데, 이 두 시즌 동안 세이커리는 부상으로 인한 기량 하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매시즌 +15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였던 세이커리는 골든 스테이트의 두 시즌 동안 평균 12득점, 7리바운드 정도만을 기록하는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96-97시즌 올랜도로 팀을 옮기면서 세이커리는 다시느 부활하여 96-97시즌에는 74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17.3득점, 9.5 리바운드를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마 그의 마지막 불꽃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97-98시즌 도중 뉴저지로 트레이드 되기 전까지 올랜도에서 47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15.0득점, 7.6 리바운드를 기록한 세이커리는 뉴저지 이적 후 9경기에만 출장, 그 기간 동안 4.7득점, 4.0리바운드로 무너졌습니다. 결국 98-99 시즌 9경기에 출장, 평균 1.7득점, 2.3리바운드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긴채 은퇴를 하게 되었지요.

통산성적은 커리어 10년 동안 678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1.6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48.4%, 평균 14.7득점(9991득점), 9.5리바운드(6424리바운드)라는 준수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특히 세이커리의 기록 중 주목해야할 것은 그의 통산 리바운드 중 30% 정도에 해당하는 2142개의 리바운드가 공격 리바운드라는 점이지요. 백인 임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움직임을 통해 게임당 평균 3.2개 정도의 공격 리바운드를 걷어올렸다는 점은 그가 상당히 괜찮은 센터였다라는 또다른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레전드는 아니지만 리그에 자신의 족적을 나름 확실히 남긴 선수라는 생각이 드네요.

1라운드 14번 Dan Majerle


1라운드 7번 픽으로 팀 페리를 선택하여 재앙과 같은 선택을 하였던 피닉스는 1라운드 14번 지명권으로 소위 말하는 대박을 치게 됩니다. 90년대 피닉스의 화려한 공격 농구의 한 축을 이루며 케빈 존슨, 찰스 바클리와 함께 피닉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더' 댄 멀리를 건진 것이지요.

대학 시절 평균 21.8득점이라는 뛰어난 득점 감각을 보여준 198cm, 100.7kg의 체격을 갖춘 댄 멀리는 수준급의 외곽슛 뿐만 아니라 속공, 포스트 업 등의 다양한 루트를 통한 득점에 능했고 동일 포지션에서 밀리지 않는 사이즈를 내세워 괜찮은 디펜스 능력까지 갖춘 인재였습니다.......

루키 시즌인 88-89시즌에는 59경기에 주로 식스맨으로 출장, 평균 25.1분을 소화하며 8.6득점, 3.9리바운드, 2.4 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90-91시즌까지는 주로 식스맨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댄 멀리는 91-92시즌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킵니다. 이 시즌에 데뷔 이후 처음으로 전 경기에 출장한 댄 멀리는 선발 출장보다 교체 출장의 횟수가 더 많았지만 평균 34.8분을 소화하며 피닉스의 실질적인 주전 슈팅 가드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 시즌 성적은 필드골 성공률 47.8%, 3점슛 성공률 38.2%, 평균 17.3득점, 5.9리바운드, 3.3 어시스트, 1.6스틸로 공수 양면에서 피닉스의 핵심적인 플레이어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후 94-95시즌까지 피닉스에서 플레이하며 +15득점을 꾸준히 기록하며 피닉스 공격의 한축을 훌륭하게 담당하였습니다.

하지만 94-95시즌을 마지막으로 클리블랜드로 이적한 댄 멀리는 부상으로 인한 기량 저하로 인해 급격한 하향세를 겪게 됩니다. 클리블랜드에서 한 시즌, 그리고 다시 97-98시즌부터 00-01시즌까지 마이애미에서 플레이하였지만 결국 피닉스 시절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선수로 전락을 하게 됩니다.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었던 01-02시즌에 다시 피닉스에 복귀하여 65경기에 주로 식스맨으로 출장하였지만 평균 4.6득점, 4.5리바운드, 2.9 어시스트의 성적을 남기고 은퇴를 하였습니다.

통산 성적은 커리어 14년 동안 955경기에 출장, 평균 31.6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3.1%, 3점슛 성공률 35.8%, 평균 11.4득점(10925득점), 4.5리바운드(4265리바운드), 2.9어시스트(2755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통산 1360개의 3점슛을 성공 시켰군요. 이 선수의 안타까운 점은 데뷔 후 피닉스 시절까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다가 커리어 중반 이후의 부상으로 인해 그 좋은 기량을 빨리 잃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피닉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팀에서 뛸때 전성기를 구가하며 피닉스가 서부의 강자로 떠오르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선택이 아니었나 합니다.

댄 멀리에 대해서는 이전에 한번 별도의 포스팅을 했던 적이 있으니 참고로 하시면 될겁니다.

http://kaga4467.egloos.com/1421682

1라운드 19번 Rod Strickland



1라운드 19번은 뉴욕 닉스에 지명된 로드 스트릭랜드입니다. 준수한 득점력과 뛰어난 리딩 능력을 갖춘 포인트 가드이지요. 이 선수의 지명 자체가 아주 나빴다고는 볼 수 없지만 뉴욕 닉스는 이미 87년 드래프트에서 마크 잭슨이라는 훌륭한 포인트 가드를 건지는데 성공하였고, 마크 잭슨은 87-88시즌 신인상을 수상하며 뉴욕 닉스의 주전 포인트 가드로 자리를 잡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 포지션의 로드 스트릭랜드를 지명한 것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당시 남아있던 선수들 중 로드 스트릭랜드의 기량이 가장 뛰어났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은.......안타까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팀에게나 선수에게나 말이죠.......

데뷔 시즌인 88-89시즌, 스트릭랜드는 마크 잭슨의 백업으로 81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16.8분 만을 소화하였습니다. 필드골 성공률은 46.7%, 3점슛 성공률 32.2%, 8.9득점, 3.9 어시스트, 1.2 스틸을 기록하였고, 두번째 시즌에는 51경기에 모두 교체로 출장하여 평균 20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4%, 평균 8.4득점, 4.3 어시스트, 1.4 스틸을 기록하는데 그쳤습니다. 결국 마크 잭슨과의 포지션 중복 문제 등으로 인해 89-90시즌 도중 스트릭랜드는 샌안토니오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샌안에서는 31경기 출장(이중 24경기 선발), 평균 14.2 득점, 8.0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드디어 주전 포인트 가드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이후 91-92시즌까지 샌안토니오에서 주전 포인트 가드로 플레이하며 평균 13.8득점에 8개 정도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A급 포인트 가드로서의 기량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스트릭랜드가 가장 빛났던 시기는 포틀랜드 시절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92-93시즌 샌안토니오를 떠나 포틀랜드에 자리를 잡은 스트릭랜드는 테리 포터와 함께 포틀랜드의 공격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시즌 스트릭랜드는 78경기에 출장(이중 선발 35경기), 평균 31.7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8.5%, 평균 13.7득점, 7.2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샌안토니오 시절에 보여준 자신의 기량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고, 93-94시즌에는 82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5.2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평균 17.2득점, 9.0 어시스트를 기록, 서부 컨퍼런스를 대표하는 포인트 가드 중 한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이후 스트릭랜드는 96-97시즌까지 포틀랜드에서 플레이를 하였는데, 이 기간 중 +17득점, 9어시스트 정도를 매해 기록하며 자신의 기량을 뽐냈었습니다.

96-97시즌부터 00-01시즌까지는 워싱턴에서 플레이를 했는데요. 98-99시즌까지는 매 시즌 +15득점, +8.5어시스트 이상을 기록하며 꾸준한 기량을 보여주었고, 특히 97-98시즌에는 평균 17.8득점, 10.5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99-00시즌부터 득점력에서부터 서서히 하향세를 타기 시작한 스트릭랜드는 00-01시즌 도중 포틀랜드로 트레이드 되었고, 다시 01-02 시즌에는 마이애미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02-03시즌에는 미네소타, 03-04시즌에는 올랜도에서 플레이하다 토론토로 트레이드 되었고, 04-05 시즌 휴스턴에서 16경기를 출장한 것을 마지막으로 커리어를 마감하게 됩니다. 02-03시즌 이후부터 스트릭랜드는 예전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며 식스맨 역할의 베테랑 포인트 가드로 이팀 저팀을 옮겨다니는 저니맨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커리어 16년 동안 1094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0.7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45.4%, 3점슛 성공률 28.2%, 평균 13.2득점(14463득점), 3.7리바운드(4084리바운드), 7.3 어시스트(7987어시스트), 1.5 스틸(1616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포인트 가드임에도 불구하고 팀웍이라는 측면에 약점이 있고 동시에 외곽슛에서 약점을 보였기에 공격 루트가 조금 단조롭다는 단점을 지적받기도 하지만 90년대에 활약한 뛰어난 포인트 가드들과 견주어봤을 때 결코 그의 능력 자체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가 기록한 7897개의 어시스트는 리그 통산 최다 어시스트 8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기도 하구요.

이런 훌륭한 커리어를 보낸 선수를 뉴욕이 선택했다는 것은 결코 욕먹을 일이 아니지만.....문제는 뉴욕에서 스트릭랜드는 단 두 시즌만을 백업 가드로 뛰었을 뿐이고, 뉴욕은 그의 기량의 도움을 별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라는 것이지요. 90년대 초반 클라이드 드렉슬러, 테리 포터, 로드 스트릭랜드, 클리포드 로빈슨, 제롬 커시, 데니 에인지 등으로 라인업을 꾸린 포틀랜드를 가장 좋아했던 팬이었던지라 스트릭랜드의 모습은 비교적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1라운드 20번 Kevin Edwards

1라운드 20번은 마이애미에 지명된 케빈 에드워즈입니다. 로드 스트릭랜드와 같이 DePaul 대학 출신의 가드이지요. 그냥 저량 11년 동안의 커리어를 보낸 선수입니다. 통산 성적은  커리어 11년 동안 평균 10.9득점, 2.7 리바운드, 2.7 어시스트 정도에 불과하지만 마이애미에서 플레이한 다섯 시즌 동안은(88-89시즌~92-93시즌) 평균 13득점 정도를 해주며 제역할을 톡톡히 한 선수입니다.

마이애미는 88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로니 세이커리와 케빈 에드워즈를 픽하면서 나름 성공적인 선택을 한 셈이 되는 것이지요. 특히 마이애미는 2라운드에서도 그랜트 롱을 선택하며 뜻밖의 대박을 맞게 됩니다. 2라운드 8번(전체 31번)으로 마이애미에 지명된 그랜트 롱은 마이애미에서 플레이한 일곱시즌 동안 그랜트 롱은 평균 12득점에 7리바운드 정도를 잡아주며 파워포워드로서의 건실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1라운드에서만 3장의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클리퍼스에 비하면 마이애미의 선택이 더더욱 돋보이네요.

1라운드 23번으로 지명된 브라이언 쇼도 올랜도와 LA 레이커스에서 플레이했던 모습들이 기억에 남아있는 선수입니다. 아주 뛰어난 커리어를 보낸 선수는 아니기에 그냥 패스하겠습니다.(솔직히 말하면 힘들어요 힘들어.....다시보는 드래프트 관련 글을 쓸때마다 느끼는 것이 결국 포스팅 마지막에 가게 되면 급격한 집중력 저하로 연결된다는 것이지요 하아~)

대충 이 정도로 해서 88년 드래프트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하겠습니다.(딱 4일 걸렸군요.....)
조만간 시간될 때 89년 드래프트 관련 포스팅을 하던지 아니면 오티스 도프나 클리포드 로빈슨에 관련된 포스팅을 쓰던지 하겠습니다.......

아아....힘들다......


덧글

  • Hadrianius 2009/08/22 19:43 # 답글

    언제나 클리퍼스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픽을 몇번 받았는지 기억을 못하겠는데 30년간 영구결번도 없고 ㅎㅎ
    저거 말고 호아킴 베누이트도 있고 정말 픽 못하고 운없는;;

    리치몬드도 올스타 MVP 수상자인데 잘 안알려져 있죠 -_-;;; 야구로 치면
    펫 헤트겐을 떠올리면 알맞을까요.

    88년 드래프트는 리치몬드, 호킨스, 채프먼, 멀리 등 불꽃남자들이 많군요 ㅎㅎ 9픽에 나온 스케일리를 모르고 있었다니 역시 저도 00년대 NBA 팬임을 단단히 입증 -_-
  • 울프우드 2009/08/23 08:48 #

    Hardrianius님 반갑습니다.

    80년대 클리퍼스는 드래프트 상위 픽을 가지고서도 번번히 삽질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니 팀이 90년대의 대부분을 바닥에서 기어다녔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리치몬드 같은 경우 단순히 올스타전 MVP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훌륭한 스코어러이자 수비수였다고 생각을 하는데 워낙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안타까운.......공격도 공격이지만 힘을 앞세워 매치업 상대를 누르는 수비도 일품이었지요......

    채프먼이나 멀리....불꽃남자......괜찮은 표현입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바른손 2009/08/24 10:35 # 답글

    대니 매닝에 대한 글을 언젠간 꼭 한 번 쓰고 싶었는데 이렇게 좋은 글을 써주시니 나중에 참고를 많이 해야겠네요.
    대니매닝이 대학때 슈퍼스타포스(감독이 래리브라운이었죠 아마?)를 뿜고 프로에선 클리퍼스란 약팀에도 있었지만 플레이스타일이 당시로선 특이했다 생각합니다.

    요즘의 라마커스 알드리지를 생각하면 쉬운데 프레임도 비슷하고,상당히 빼어난 득점감각에 비해서 소프트하단 인상이 강했죠.보드장악에도 약했고.
    하지만 득점본능이나 슛터치 골밑에서 림을 향한 본능등이 탁월했던 선수로 기억나네요.
  • 바른손 2009/08/24 10:36 # 답글

    찰스 오클리와 짝을 이루던 찰스 스미스도 매끈한 몸만큼이나 득점하나만큼은 좋았던 선수로 기억나고(터프하기도 했고)

    네츠의 크리스 모리스, 케빈에드워즈도 기억이 나네요.

    미치 리치먼드는 정말 득점력만큼이나 강인했던 수비력이 참 인상적이었어요.수비력강한 2번이 논해질떄 자주 언급이 안되는데 참 수비가 좋았어요.정말 강렬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 바른손 2009/08/24 10:36 # 답글

    릭스미츠나 로니세이컬리(늘 그 시절 루키에서 잘 생긴 농구선수로 거론되던 ㅎㅎ)도 오랫만에 접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울프우드님 :)
  • 울프우드 2009/08/24 13:26 #

    바른손님 반갑습니다...
    88년 드래프트의 경우에는 리그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선수는 별로 없는 것 같은데도 참 익숙한 선수들이 많더라구요.

    매닝의 경우에는 참 안타까우면서도 뭔가 실망스런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분명 재능과 능력을 보유한 선수인데 뭔가가 부족한......

    그리고 찰스 스미스 같은 경우에는 그가 못했다기 보다는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을 팀이 원하였다는 느낌이 드네요.......닉스 시절에는 정말 터프했었지요......

    릭스미츠나 로니 세이커리는 백인 센터들 중에서 상당히 좋은 활약을 펼쳤던 선수들이었지요. 바른손님 말씀대로 로니 세이커리는 잘생긴 농구 선수....^^

    리치몬드 같은 경우에는 종종 단순히 3점 슛이 좋은 슛터 정도로만 사람들이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득점력과 함께 'The Rock' 'Hammer'라고 불리울 정도의 강력한 수비력 역시 일품인 훌륭한 선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부족한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폭주천사 2009/08/24 16:10 # 삭제 답글

    88년 드래프트 관련 포스팅도 잘 읽었습니다. 이 포스팅도 이제 기다려지는 시리즈가 되었습니다. ^^

    88년 드래프트에는 좋은 롤 플레이어들이 많네요. 대니 매닝은 도미니크 윌킨스와 트레이드 되었었죠. 당시에 한창 잘나가던 애틀란타였는데, 이 트레이드는 결과적으로 실패였던 것 같아요. 당시 루키잡지에서 읽었던 것인데 매닝은 우승을 위해서 헐값에 선즈로 갔다고 하더라고요. ㅎㅎ.

    릭 스미츠는 데이비스 형제들과 함께 뉴욕과 혈투를 벌이던 것이 생각나네요. 유잉+오클리+메이슨 대 스미츠와 데일, 안토니오 데이비스.

    미치 리치몬드는 그 능력에 비해서 평가도 박한 편이고, 특히 말년이 너무 초라했던 것 같습니다. 레이커스에게 묻어서 챔피언 반지를 얻는 미치 리치몬드의 모습은 그가 커리어동안 보여줬던 모습에 비해서 너무 안쓰러웠어요. 큼
  • 울프우드 2009/08/24 16:18 #

    폭주천사님 반갑습니다.....
    부족한 글 기다려지신다는 말씀에 너무나 감사하네요^^

    네...88년 드래프트에는 레전드 급으 선수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견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플레이어들이 많이 보인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매닝의 경우에는 대학 시절에 빛났던 그의 재능이 NBA에서는 조금 부족한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득점 센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확실히 디펜스나 리바운드 등 수비적 측면에서의 능력이 약한 느낌이고 동시에 부상을 달고 사는 몸상태도 그렇고.....

    역대 1라운드 1번 선수 중 많이 아쉬운 선수 중 한명이랄까요.......

    릭스미츠와 데이비스 형제 조합은 당시 명센터들이 주름잡던 시대에도 꽤 경쟁력있는 조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뉴욕 닉스 팬이었던 제 입장에서는 밀러도 밀러지만 인디애나의 골밑 3인방의 터프함과 끈질김도 참 무서웠었거든요.....

    리치몬드는 정말 레전드 급의 활약을 펼친 선수라고 생각하지만 커리어 후반에 너무나 급속하게 쇠퇴하면서 평가절하된 부분이 많은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까워요.......

    부족한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음경을 확대하는 방법 kr 2022/09/07 18:44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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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ak skutecznie powię 2022/09/16 00:49 # 삭제 답글

    잘했어 여기로 돌아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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