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1989년 NBA 드래프트에서 지명된 선수들..... 스포츠

시리즈 아닌 시리즈로 종종 쓰던 예전 드래프트에 대한 포스팅도 벌써 여섯 번째네요......

드디어 레전드 급들이 쏟아져나왔던 80년대 드래프트의 마지막 해입니다.......89년 드래프트에서 상당히 좋은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동시에 실망스러운 선수들도 등장하게 되는데요......우선 89년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지명된 선수들을 살펴보죠.......

지명순위-팀-선수명-출신 대학

1 Sac Pervis Ellison Louisville
2 LAC Danny Ferry Duke
3 SA Sean Elliott Arizona
4 Mia Glen Rice Michigan
5 Char J.R. Reid North Carolina
6 Chi Stacey KingOklahoma
7 Ind George McCloud Florida State
8 Dall Randy White Louisiana Tech
9 Wash Tom Hammonds Georgia Tech
10 Minn Pooh Richardson UCLA
11 Orl Nick Anderson Illinois
12 NJ Mookie Blaylock Oklahoma
13 Bos Michael Smith Brigham Young
14 GS Tim Hardaway Texas-El Paso
15 Den Todd Lichti Stanford
16 Sea Dana BarrosBoston College
17 Sea Shawn Kemp Trinity Valley
18 Chi B.J. Armstrong Iowa
19 Phil Kenny Payne Louisville
20 Chi Jeff Sanders Georgia Southern
21 Utah Blue Edwards East Carolina
22 Port Byron Irvin Missouri
23 Atl Roy Marble Iowa
24 Phoe Anthony Cook Arizona
25 Clev John Morton Seton Hall
26 LAL Vlade Divac None (Yugoslavia)
27 Det Kenny Battle Illinois

88년 드래프트와 마찬가지로 괜찮은 커리어를 보낸 선수들이 제법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 레전드 급.....그야말로 명예의 전당급 커리어를 보여준 선수는 팀 하더웨이 정도네요.....(숀 캠프 같은 경우에는 커리어 말년이 너무나 안습이나 붉은색으로 표시하지 않으려 했으나 시애틀 시절 게리 페이튼과 펼친 콤비 플레이의 임펙트가 너무나 강해서 고민 끝에......)

동시에 1989년 드래프트에서는 상위 라운드에 지명된 선수들 중 역대 최악이라 평가받을만한 선수들도 다수 보입니다.......

자아.....그럼 차근 차근 살펴보도록 하죠.......

1라운드 1번 Pervis Ellison


1989년 1라운드 1번 픽을 가지고 있었던 새크라멘토는 루지빌 대학 출신의 퍼비스 엘리슨을 지명합니다......
종종 역대 최악의 드래프트 1번 픽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선수이지요. 84년 드래프트부터 쭉 포스팅을 해오면서 1라운드 1번으로 지명된 선수에 제가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지만.....1989년 드래프트 당시 이 선수를 지명한 새크라멘토의 선택이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퍼비스 엘리슨은 208cm, 110kg의 체격 조건으로 대학 시절 주로 PF와 C 포지션에서 플레이한 이 선수는 대학 4년간 +2000득점, +1000리바운드를 기록한 뛰어난 선수였으며 그의 체격 조건은 NBA에서 센터로서는 조금 작지만 PF 포지션에서는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새크라멘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그는 대학 1학년 시절 팀이 통산 2번째의 NCAA 챔피언쉽을 거머지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그 결과 1학년으로서는 역사상 두번째로 MOP(Most Outstanding Player)에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 4년간 통산 성적은 평균 15.8득점, 8.4 리바운드였습니다......

팀과 팬들의 기대 속에 퍼비스 엘리슨은 89-90시즌에 리그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48경기를 결장하며 34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고, 평균 플레이 타임은 25.5분, 필드골 성공률 44.2%, 평균 8.0득점, 5.8리바운드, 1.9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과 팬들을 모두 실망시켰고 그의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새크라멘토는 시즌 종료와 함께 과감하게 그를 포기하게 됩니다. 결국 엘리슨은 1라운드 1번으로 지명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즌만에 집을 꾸려 다른 팀으로 옮겨가는 신세가 되었지요. 그가 자리를 잡은 팀은 워싱턴 불리츠였습니다(지금의 워싱턴 위저드이지요).

워싱턴에서 맞이하느 90-91시즌.....그는 건강을 되찾고 76경기에 출장하였습니다(선발 30경기). 평균 25.6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51.3%, 평균 10.4득점, 7.7리바운드, 1.3 어시스트, 그리고 2.1 블락슛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올리며 자신의 잠재력을 서서히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데뷔 세번째 시즌인 91-92시즌.....그는 대폭발을 하게 됩니다. 워싱턴의 주전 파워 포워드 자리를 꿰차는데 성공한 그는 66경기에 출장(이중 선발 64경기), 평균 38.0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53.9%, 평균 20.0득점, 11.2리바운드, 2.9어시스트, 2.7 블락슛을 기록하며 자신이 최악의 1라운드 1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전 시즌에 비해 두 배 이상의 위력을 보여주었으니 당연히 이 시즌 기량 발전상(MIP)는 당연히 엘리슨의 몫이었지요.

그리고 92-93시즌 중반까지 퍼비스 엘리슨은 49경기에 출장하며 평균 34.7분, 필드골 성공률 52.1%, 평균 17.4득점, 8.8리바운드, 2.2 블락슛을 기록하며 전년도의 성적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해가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여기서부터 그의 커리어는 꼬여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리그에 적응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켜나고 있었던 그는 92-93시즌 중반 불의의 무릎 부상으로 시즌을 마갑하게 됩니다. 이때의 무릎 부상으로 그는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퍼비스 엘리슨은 PF라는 점을 감안해도 공격 범위는 좁은 편이었습니다. 4번으로서는 좋은 신체 사이즈와 파워를 이용해 주로 포스트에서의 득점을 주로 하였던 그는 무릎 부상 이후 건강할때의 움직임을 더 이상 보여주지 못했고, 신장에 비해 긴 팔을 이용하여 게임 당 2개 이상의 블락슛을 기록하였던 그의 수비력도 이 부상을 기점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즉, 무릎 부상 한번으로 그는 공수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확실한 장점을 모두 상실하게 된 것이지요. 93-94 시즌에 복귀하였지만 47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고, 평균 플레이 타임도 두 시즌 만에 30분 미만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필드골 성공률도 세 시즌 만에 50%미만으로(46.9%), 평균 득점 역시 10점 미만(7.3득점), 리바운드 역시 5.1개로 루키 시즌보다 더 낮아지게 되었지요. 결국 92-93시즌의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엘리슨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부상에서 복귀한 93-94시즌 이후 커리어를 마감하게 되는 00-01시즌까지 그가 60경기 이상을 출전한 시즌은 95-96시즌이 유일하였습니다(단축 시즌으로 치루어진 98-99시즌은 제외). 그리고 평균 플레이 타임에서 21분을 넘어선 적은 한번도 없지요. 그리고 95-96시즌을 마지막으로 +5득점을 기록한 적도 없었습니다. 물론 워싱턴 이후, 보스턴과 시애틀에서 플레이하는 동안 변함없이 볼에 대한 집념과 투지는 보여주었지만 한번 당한 무릎 부상은 그에게 너무나 치명적인 것이었지요.

결국....00-01시즌 시애틀에서 9경기 출장, 평균 4.4분, 필드골 성공률 28.6%, 평균 0.7득점, 1.3리바운드, 0.3 어시스트, 0.2 블락슛이라는 참담한 성적을 마지막으로 그는 유니폼을 벗게 됩니다. 통산 성적은 10시즌 동안 474경기에 출장(선발 245경기),평균 24.5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51.0%, , 평균 9.5득점, 6.7 리바운드, 1.5어시스트, 1.5 블락슛을 기록하였습니다.

만약 92-93시즌에 당한 불의의 부상만 아니었다면 역사상 최악의 1라운드 1번 픽 선수를 이야기할 때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어쩌겠습니까......역사에 가정이란 없는 것을........

이래 저래 참 안타까운 선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1라운드 2번 Danny Ferry
아....이 시리즈를 시작하고 난 이후.....1라운드 1번과 2번으로 지명된 선수들 모두가 동시에 안습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89년 드래프트에서 지명된 1라운드 1번, 2번으로 지명된 선수들은 모두 역대 최악이라고 불릴 만큼의 커리어를 보낸 선수들이네요......부상으로 인하여 안타깝게 망가진 퍼비스 엘리슨과 함께 1라운드 2번으로 지명된 데니 페리 역시 역사상 최악의 2번 픽 선수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좋지 못한 커리어를 보낸 선수입니다.

84년 이후 드래프트에서 매번 상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클리퍼스의 삽질은 이전 포스팅에서도 몇번씩 지명되었습니다. 그리고 89년 드래프트에서도 2번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클리퍼스는 208cm, 106kg의 좋은 신체 조건을 가진 백인 포워드 데니 페리를 지명합니다. 1960년대 NBA에서 활동한 센터 밥 페리의 아들이었던 그는 대학 시절, 농구 명문 듀크 대학의 에이스였습니다. 여기서 잠시 듀크 대학 시절 그의 커리어를 잠시 살펴볼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대학 시절의 데니 페리는 위대함 그 자체였습니다. 86년에 듀크 대학에 입학한 그는 86년, 88년, 89년에 팀을 NCAA 파이널 포로 이끌었습니다. 동시에 1988년에는 All-America second team, 89년에는 All-America first team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 10월에는 지금도 듀크 대학 농구부 역사상 한 경기 최다 득점인 58득점을 마이애미 대학과의 경기에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듀크 대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서, 통산 득점에서는 듀크 대학 사상 5위, 리바운드 5위, 어시스트 7위에 올라있습니다.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세 부분에서 듀크 역사상 통산 랭킹 10위 안에 들어가 있는 선수는 데니 페리가 유일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2002년에는 이러한 기록들을 인정받아 ACC 50th Anniversary men's basketball team에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대학 시절 그는 최고였습니다. 이런 다재다능하고 동시에 위력적인 선수를 마다할 팀이 어디에 있을까요. 당연히 80년대 드래프트 최고의 삽질 팀 중 하나인 클리퍼스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2번 픽을 이 선수에게 던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약체인 클리퍼스에 플레이하는 것이 싫었던 페리는 클리퍼스와의 계약을 거부하고 이탈리아 리그 진출을 선언하게 됩니다. 결국 페리를 지명한 클리퍼스는 닭 쫓던 개 지붕쳐다보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지요. 결국 1년을 기다린 클리퍼스는 그에 대한 권리와 센터인 레지 윌리엄스를 묶어 클리블랜드로 넘겨버리고 그 대가로 클리블랜드의 스코어러였던 론 하퍼와 다음 해 1라운드 지명권과 2라운드 지명권을 넘겨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됩니다. 내심 페리를 팀의 에이스감으로 점찍어둔 클리블랜드는 거의 만세를 부르는 분위기였고 클리퍼스 역시 론 하퍼라는 뛰어난 득점력을 보유한 에이스급 가드를 확보함과 동시에 드래프트 1라운드와 2라운드 지명권을 한장 씩 확보하며 괜찮은 장사를 하였습니다. 자아....하지만 이 트레이드의 승자는 결과적으로 클리퍼스였습니다.....(드래프트에서 삽질만을 하던 클리퍼스가 어떻게 이런 최고의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는지......)

페리에 대한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클리블랜드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그에게 10년 장기 계약을 덥석 안겨줍니다(10년간 총액이 대략 3700만 달러가 넘어가는 당시로서는 대형 계약이었지요). 네....그들의 기대대로 되었다면 참 좋았겠습니다만.....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페리는 NBA에서 단 한번도 대학 시절 그가 보여주었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클리블랜드에서 플레이한 10시즌 동안 그가 평균 10득점 이상을 기록한 시즌은 95-96시즌과 96-97시즌 단 두번 밖에 없었습니다(95-96시즌에 13.3득점으로 커리어 하이 기록, 96-97시즌 10.6득점). 리바운드는 클리블랜드에서 플레이한 10시즌 동안 96-97시즌에 기록한 평균 4.1개가 커리어 하이에 해당되는군요.......

물론 페리를 영입했던 첫 두 시즌 동안 클리블랜드는 57승과 54승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올렸지만, 이것은 마크 프라이스와 브래드 도허티의 맹활약 때문이지 결코 페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클리블랜드에서 처음 플레이했던 90-91시즌에 기록한 득점은 평균 8.6득점이었고, 91-92시즌에는 평균 5.1 득점이었습니다. 만약 페리가 대학 시절의 포스를 보여주며 팀 공격에서 확실한 비중을 점해주었다면 클리블랜드가 그분이 이끄는 황소 군단에 그리도 처참히 농락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클리블랜드에서 열 시즌을 뛴 페리는 00-01시즌부터 02-03시즌까지 세시즌 동안 2000년대 초반의 강팀 샌안토니오에서 플레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시즌 동안 페리가 기록한 득점은 평균 5.6득점, 4.6득점, 1.9득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02-03시즌 그는 샌안토니오가 우승할 때 팀의 멤버로서 커리어 마지막 시즌에 우승 반지를 끼는데 성공을 한 참으로 운 좋은 선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네요........

통산 성적은 커리어 13시즌 동안 917경기 출장(선발 186경기), 평균 19.8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4.6%, 3점슛 성공률 39.3%, 평균 7.0득점, 2.8리바운드, 1.3 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큰 부상없이 주로 식스맨으로 활동하였지만......그는 1라운드 2번 픽 출신이고 동시에 농구 명문 듀크 대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플레이어였던 점에서 너무나 실망스러운 선수가 아니었나 싶네요.

1라운드 3번 Sean Elliot


처참한 커리어를 보낸 엘리슨과 페리를 지나 1라운드 3번으로 지명된 선수는 션 엘리어트였습니다. 87년 드래프트 1라운드 1번으로 데이비드 로빈슨을 지명했던 샌안토니오는 로빈슨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89-90시즌에 그를 받쳐줄 선수가 필요하였고 이러한 필요성 아래에서 그들의 눈을 사로잡은 선수는 훗날, 조용한 가운데 상대편에게 비수와 같은 득점을 꽂아넣는다고 해서 닌자라는 별칭을 얻게 되는 아리조나 대학 출신의 SF 션 엘리어트를 지명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샌안토니오의 선택은 상당히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 대학 4년간 133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19.2득점, 6.1 리바운드, 3.4 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커리어 12시즌 동안 11시즌을 샌안토니오에서 플레이하며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 샌안토니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결정적인 시합의 결정적 상황에서 수많은 클러치 슛을 작렬시키며 팀과 팬들에게는 승리의 기쁨에는 상대팀에게는 패배의 아픔을 심어준 훌륭한 선수였지요.

루키 시즌인 89-90시즌.....물론 팬들의 모든 시선은 87년에 지명되어 이 시즌에 데뷔한 제독 로빈슨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하지만 션 엘리어트 역시 루키임에도 불구하고 81경기에 출장(선발 69경기)하여, 평균 25.1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8.1%, 평균 10.0득점, 3.7리바운드, 1.9 어시스트, 0.6 스틸을 기록하며 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1라운드 3번에 지명된 선수치고는 데뷔 첫 시즌에 그리 강력한 임펙트를 선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2년 차인 90-91시즌부터 엘리어트는 로빈슨에 이은 팀의 두번째 공격 옵션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이 시즌에 션 엘리어트는 82경기 모두 선발 출장하여 평균 37.1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9%, 3점슛 성공률 31.3%, 15.9득점, 5.6리바운드, 2.9 어시스트, 0.8 스틸을 기록하며 주전 스몰 포워드로 자리잡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91-92시즌에는 평균 16.3득점, 92-93시즌에는 17.2 득점을 기록하며 좋은 득점력을 갖춘 스몰 포워드로 성장하던 션 엘리어트는 93-94시즌 시작 직전 디트로이트로 팀을 옮겨 딱 한시즌을 뛰었습니다. 디트로이트에서 73경기에 주전 스몰 포워드로 출장하였으나 샌안토니오 시절에 비해 부진한 12.1득점, 3.6리바운드, 2.7 어시스트를 기록하는데 그친 그는 시즌 종료와 함께 다시 샌안토니오로 돌아와 은퇴할 때 까지 샌안토니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팀과 팬들의 사랑을 받게 되지요. 팀에 복귀한 94-95시즌 엘리어트는 다시 평균 18.1득점을 기록하며 자신의 공격력을 회복하였고, 95-96시즌에는 커리어 하이에 해당하는 평균 20.0득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커리어 초반 빠른 스피드를 통해 패너트레이션을 통한 득점을 주로 하였던 션 엘리어트는 이후 신장 이상으로 인해 수술을 받게되고 그 이후 커리어 초반과 같은 폭발적인 돌파력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션 엘리어트는 확률높은 3점슛을 자신의 공격 수단으로 장착하며 결정적인 순간의 클러치 샷으로 팀에게 승리를 선사하였습니다. 96-97시즌 39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14.9득점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 전까지 그가 +12득점을 기록한 시즌은 없습니다. 그가 마지막 불꽃을 태운 것은 아마 샌안토니오가 트윈 타워를 앞세워 우승을 거머쥐었던 98-99시즌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시즌 션 엘리어트는 50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장하여 평균 30.2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1.0%, 3점슛 성공률 32.8%, 평균 11.2득점, 4.3리바운드, 2.3 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네....한팀의 주전 스몰 포워드로서 좋지 못한 기록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팀의 에이스는 데뷔 2년 차인 미스터 기본기 팀 던컨이었고 90년대 팀의 에이스였던 로빈슨이 제 2공격 옵션이 될 정도로 팀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션 엘리어트는 98-99시즌 플레이오프 서부 컨퍼런 결승 2차전.....포틀랜드와의 경기에서 믿기지 않는 미라클 샷을 성공시키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경기 막판 두점을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장거리 3점슛을 성공시키며 팀에게 1점차 승리를 선사하였지요. 이 샷은 지금까지도 팬들에게 "Memorial Day Miracle"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리고 98-99시즌에 샌안토니오는 드디어 우승을 하였고 엘리어트는 은퇴 전에 챔피언 반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통산 성적은 커리어 12시즌 동안 742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3.0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46.5%, 3점슛 성공률 37.5%, 평균 14.2득점(10544득점), 4.3 리바운드(3204리바운드), 2.6 어시스트(1897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네....통산 성적 자체가 아주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하지만 90년대 그가 데이비드 로빈슨과 보여준 플레이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훌륭한 것이었지요. 그는 필요한 순간 득점을 해줄 수 있는 훌륭한 스몰 포워드였습니다. 기록 자체가 그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종종 기록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선수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 선수 중 한명이 바로 션 엘리어트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네요........

1라운드 4번 Glen Rice


1988년에 창단한 마이애미 히트는 8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4번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4번 지명권을 미시간 대학의 가드 겸 포워드인 글렌 라이스를 지명하는데 사용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마이애미의 지명은 성공적이었지요. 글렌 라이스를 지명함으로써 마이애미 히트는 팀에 있어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얻게 됩니다. 90년대의 마이애미를 이야기하면 알론조 모닝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95년에 알론조 모닝이 샬럿을 떠나 마이애미로 오기 전까지 마이애미의 프렌차이즈는 분명 글렌 라이스였습니다.(물론 알론조 모닝의 트레이드 상대가 그였기에 그는 알론조 모닝이 마이애미로 올 때 샬럿으로 팀을 옮기지만)

88년 드래프트에서 로니 세이커리라는 훌륭한 센터를 지명했던 마이애미에게 필요했던 것은 외곽에서 팀의 공격력을 끌어올려주며 득점을 해줄 수 있는 스코어러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미시간 대학 시절 4년 간 필드골 성공률 56.9%, 3점슛 성공률 48%(특히 4학년 때에는 3점슛을 192개를 시도하여 99개를 성공시키며 성공률 51.6%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웁니다), 평균 18.2득점, 6.4리바운드를 기록한 글렌 라이스는 마이애미의 필요를 100% 충족시켜줄 수 있는 선수였습니다.

루키 시즌인 1989-90시즌, 라이스는 77경기에 출장(선발 60경기), 평균 30.0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3.9%, 3점슛 성공률 24.6%(확실히 NCAA에 비해 길어진 3점슛 라인의 거리로 인해 대학 시절 좋은 3점 슛터로 평가받았던 대부분의 선수들의 데뷔 시즌 3점슛 성공률은 그리 좋지 못하네요), 평균 13.6득점, 4.6리바운드, 1.8 어시스트라는 괜찮은 성적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루키 시즌을 통해 리그에 적응한 글렌 라이스는 두번째 시즌인 90-91시즌부터 스코어러로서의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키기 시작합니다. 90-91시즌, 라이스는 77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4.4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은 46.1%, 3점슛 성공률은 38.6%, 평균 17.4득점, 4.9리바운드, 2.5 어시스트, 1.3 스틸을 기록하며 출장 시간 및 필드골 성공률과 3점슛 성공률, 평균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모든 부분에서 루키 시즌에 비해 향상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데뷔 세번째 시즌인 91-92시즌에는 79경기에 출장하여 필드골 성공률 46.9%, 3점슛 성공률 39.1%, 평균 22.3득점, 5.0리바운드, 2.3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20득점, +5어시스트를 기록, 동부 컨퍼런스에서 손꼽히는 슛터로 자리를 잡게 되지요. 이후 94-95시즌까지 마이애미에서 플레이한 라이스는 92-93시즌에 평균 19득점, 93-94시즌에 평균 21.1득점, 그리고 94-95시즌에는 22.3득점을 기록하며 경기당 +20득점을 확실히 책임져주었습니다(특히 94-95시즌에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3점슛 성공률 +40%를 기록하게 됩니다).

하지만 좀 더 강력한 팀으로 거듭나기 위해 팀 전력을 재정비하고 있었던 마이애미는 95-96시즌, 팀의 에이스인 글렌 라이스를 샬럿으로 보내고 샬럿의 센터인 알론조 모닝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트레이드는 오히려 라이스 개인에게 더 좋은 기회를 주게 되는데요. 샬럿에서 플레이한 세 시즌 동안 라이스는 세 시즌 연속 +21득점을 기록하였고 세 시즌 연속으로 3점슛 성공률 역시 40% 이상을 기록하며 리그 최강의 3점 슛터로 거듭나게 됩니다. 특히 96-97시즌은 그의 커리어 하이 시즌으로 79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42.6분을 소화하는 강철 체력을 과시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47.7%, 3점슛 성공률 47%(440개 시도 207개 성공), 평균 26.8득점, 4.0 리바운드, 2.0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이 시즌 라이스는 207개의 3점슛을 성공시켜 이 부분 3위에 올랐고, 47%의 3점슛 성공률은 리그 1위 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뛰어난 성적을 바탕으로 그는 처음으로 All-NBA Second Team에 선정되었지요. 그리고 데뷔 후 두번째로 올스타전에 출장하여 25분을 뛰는 동안 3점슛 4개 포함 26득점을 꽂아넣으며 올스타전 MVP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라이스 커리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빛나고 화려했던 순간이 바로 96-97시즌이 아니었나 싶네요.

97-98시즌까지 샬럿에서 플레이한 세 시즌이 바로 글렌 라이스의 절정기였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라이스는 98-99시즌, 서부의 강자 레이커스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코비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의 존재만으로도 레이커스는 확실한 파이널 컨텐더였고 이들에 더해서 외곽에서 득점을 책임져줄 수 있는 글렌 라이스의 가세는 레이커스 전력의 완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이커스로 이적하여 맞이한 첫 시즌은 98-99시즌, 라이스는 3점슛 성공률 39.3%, 평균 17.5득점을 기록하였지만 많은 경기에 결장하며 불과 27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99-00시즌,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라이스는 80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장하여 평균 31.6분, 필드골 성공률 43%, 3점슛 성공률 36.7%, 평균 15.9득점, 4.1 리바운드, 2.2 어시스트로 샤크와 코비에 이은 팀의 3공격 옵션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고 드디어 우승 반지를 획득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기량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한 글렌 라이스는 00-01시즌 뉴욕 닉스에서 주로 식스맨으로 출장하며 평균 12.0득점을 기록하는데 그치게 되고, 01-02 시즌과 02-03시즌에는 휴스턴에서 뛰어지만 01-02시즌에는 20경기, 02-03시즌에는 62경기(그중 선발 26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치게 되고 득점 역시 8.6득점, 9.0득점으로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03-04시즌, 클리퍼스에서 18경기에 교체로 출장하여 필드골 성공률 28.9%, 3점슛 성공률 17.9%(아아....노쇠라는 것은), 평균 3.7득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를 하게 됩니다.

통산 성적은 커리어 14시즌 동안 1000경기에 출장(이중 선발 876경기), 평균 35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5.6%, 3점슛 성공률 40.0%(3896개 시도, 1559개 성공), 평균 18.3득점(18336득점), 4.4 리바운드(4387리바운드), 2.1 어시스트(2097어시스트), 1.0 스틸(958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1559개의 3점슛 개수는 NBA 통산 5위에 해당하는 대기록이며, 통산 40.0%의 3점슛 성공률은 역대 29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14번으로 지명되는 팀 하더웨이와 함께 89년 드래프티들 중에서 최고의 선수가 바로 글렌 라이스라고 생각합니다.....

1라운드 5~9번에 지명된 선수들은 모두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지 못한 선수들의 집합입니다.......그 중에서도 1라운드 6번으로 시카고에 지명된 스테이시 킹과 8번으로 지명된 랜디 화이트는 모두 팀과 팬들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준 선수들이지요.
84년과 87년 드래프트에서 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던 시카고는 골밑을 든든히 지켜줄 수 있는 센터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오클라호마 대학 4학년 때 평균 26.0득점, 10.1 리바운드를 기록한 211cm의 스테이시 킹은 분명 지명할 수 밖에 없었던 선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학 시절에 출중한 플레이를 했다해도 NBA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거나 혹은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며 사라져간 수많은 선수들이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스테이시 킹이 이런 선수였지요. 단조로운 공격 패턴과 느린 스피드로 인해 당시 좋은 빅맨들이 우글거리는 리그의 골밑에서 그는 그 어떠한 경쟁력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여섯 시즌이라는 짧은 커리어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고, 통산 성적은 평균 6.4득점, 3.3 리바운드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리고 1라운드 8번으로 댈러스에 지명된 랜디 화이트......네.....클리퍼스와 함께 80년대 드래프트에서 가장 많은 삽질을 했던 댈러스에게 랜디 화이트는 또 한번의 비수를 꽂아버립니다. 칼 말론의 출신 대학인 루지애나 공대 출신의 포지션이나 체격 조건에서 칼 말론과 거의 유사한 선수였지요. 대학 시절의 기록도 4년간 평균 15.3득점, 8.3 리바운드로 훌륭했었습니다. 특히 4학년 시절에는 평균 21.2득점, 10.5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많은 팀들의 주목을 받았었지요.
하지만 NBA에서 그가 보여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커리어는 달랑 다섯 시즌 밖에 유지되지 못하였고 그 기간 동안에 그가 기록한 성적은 평균 7.4득점, 4.9리바운드로 처참한 수준이었지요. 뭐 시카고야 조던-피펜-그랜트의 트리오가 워낙에 강력했었기에 킹이 실망스러웠다 해도 큰 타격은 아니었습니다만 댈러스는 정말.....어떻게 찍을때마다 삽질인지......하아......

안습의 5번~9번까지를 지나 1라운드 10번으로 지명된 선수는 Pooh Richardson입니다.

1라운드 10번 Pooh Richardson

리차드슨은 185cm의 단신 포인트 가드로서 UCLA 출신입니다. 대학시절 3학년 때 까지는 득점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한 가드로 평가받았지만 4학년 시절 15.2득점, 7.6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단점으로 지적된 득점력에서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89년에 창단되어 리그에 참여한 신생팀인 미네소타는 이 선수를 지명하며 리차드슨이 포인트 가드로서 팀을 이끌어주기를 희망하였습니다. 팀의 기대를 받으며 리그에 데뷔한 리차드슨은 89-90시즌, 82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1.5분을 소화, 필드골 성공률 46.1%, 평균 11.4득점, 6.8어시스트, 1.6 스틸을 기록하며 All-Rookie First team에 선정되면서 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시즌인90-91시즌 리차드슨은 82경기에 출장(모두 선발), 평균 38.5분을 소화하는 체력을 과시하며 필드골 성공률 47%, 평균 17.1득점, 9.0 어시스트, 1.6 스틸의 올스타급 기록을 올리며 어시스트 부분 5위에 랭크되었고, 92-93시즌에도 82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장하여 평균 35.6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6.6%, 평균 16.5득점, 8.4 어시스트(어시스트 부분 6위)를 기록하며 이전 시즌의 성과가 단순히 반짝 활약이 아님을 증명하였습니다. 미네소타에서의 3년 동안 임펙트 있는 모습을 보여준 리차드슨은 92-93시즌, 인디애나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인디애나에서도 주전 포인트 가드로 출장하여 평균 10.4득점, 7.7 어시스트를 기록, 득점은 미네소타 시절에 비해 많이 낮아졌지만 경기당 일곱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괜찮은 포인트 가드로서의 모습을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93-94시즌,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결장한 리차드슨은 결국 94-95시즌에 클리퍼스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94-95시즌, 클리퍼스의 주전 포인트 가드로 80경기에 출장하여 10.9득점, 7.9 어시스트로 건재함을 과시하였지만 95-96시즌부터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95-96시즌부터 그가 커리어를 마감하게 되는 98-99 시즌까지 그가 6개 이상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적은 없었습니다. 매 시즌 60경기 이상은 꾸준히 출장하였지만 96-97시즌부터는 주전이 아닌 백업 포인트 가드로 밀려나며 플레이 타임도 20분 미만으로 떨어지게 되었죠. 결국 98-99시즌 클리퍼스에서 11경기에 교체로만 출장하여 2.5득점, 2.7 어시스트라는 성적을 남기고 은퇴를 하였습니다.
통산 성적은 커리어 10시즌 동안 639경기에 출장, 평균 30.4분을 소화하며 평균 11.1득점, 6.5 어시스트, 1.3 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종종 미네소타가 1라운드 10번으로 포인트 가드를 지명할 것이었다면 리차드슨이 아니라 팀 하더웨이를 선택하는 것이 옳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미네소타에서의 3년 동안은 리차드슨이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꼭 미네소타의 선택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물론 팀과 팬들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안타까운 선수인 것은 분명하지만요.

1라운드 11번 Nick Anderson


미네소타와 함께 1989년 신생팀으로 창단된 올랜도 매직은 그들의 역사적인 첫번째 드래프트 픽을 일리노이 대학 출신의 다재다능한 가드/포워드인 닉 앤더슨에게 행사합니다. 닉 앤더슨은 일리노이 대학에서 2년간 플레이하며 17.0득점, 7.3 리바운드, 1.8 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198cm, 103kg의 신체 사이즈도 훌륭했고 무엇보다도 외곽슛과 돌파가 모두 능해 득점 루트가 다양했으며, 수비력도 상당히 탄탄했던 선수였지요. 특히 닉 앤더슨 하면 95년 플옵에서 야구를 하다가 복귀한 45번의 그분을 막아내며, 결정적 순간 드리블을 하던 조던의 뒤에서 따라붙어 결정적인 스틸을 했던 장면, 그리고 95년 파이널 1차전에서 막판 박빙의 상황에서 자유투 4개를 모두 놓치며 연장 끝에 팀이 패배하는 결정적 빌미를 제공한 장면이 특히나 유명하죠.

자아....어찌되었거나 올랜도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닉 앤더슨을 지명하였고 앤더슨은 샤크와 페니의 등장 이전까지 올랜도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공수에서 모두 팀의 에이스 역할을 충실히 하였으니까요. 그리고 샤크와 페니 등장 이후에는 팀 공격의 세번째 옵션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준 선수였습니다. 루키 시즌인 89-90시즌에 81경기에 출장하였지만 주전보다는 백업에 가까웠습니다. 선발 출장 경기는 아홉 경기에 불과했고, 평균 플레이 타임도 22분이었으니까요. 필드골 성공률은 49.4%, 3점 슛 성공률은 역시 멀어진 라인에 적응하지 못하며 5.9%라는.....슈팅 가드와 스몰 포워드 포지션을 번갈아 보는 선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안습이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물론 그리 많은 3점슛을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17개 시도에 1개 성공이었으니까요). 루키 시즌 최종 성적은 평균 11.5득점, 3.9리바운드, 1.5어시스트, 0.8 스틸로 루키 시즌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올려주었습니다. 90-91시즌에는 좀더 향상되어 평균 14.1득점, 5.5리바운드, 1.5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물론 이 시즌에도 주전으로 출장한 경기는 70경기 중 42경기였고, 출장 시간 역시 평균 30분을 넘기지 못하였습니다.

앤더슨이 팀의 주전 자리를 굳히게 되는 것은 세번째 시즌인 91-92시즌이었습니다. 이 시즌 그는 60경기에 출장(선발 59경기), 평균 36.7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6.3%, 3점슛 성공률 35.3%, 평균 19.9득저, 6.4리바운드, 2.7 어시스트, 1.6 스틸을 기록하며 창단된지 얼마 안된 신생팀의 에이스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92년 드래프트에서 올랜도는 최고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1라운드 1번 픽을 획득한 팀은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파워 센터로 성장하게 될 샤킬 오닐을 영입하게 되었고, 데뷔 이후 홀로 모든 부담을 짊어졌던 닉 앤더슨은 강력한 동료(단순히 강력한 동료가 아니라 팀의 강력한 에이스)와 함께 드디어 플옵을 노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오닐과 함께 플레이했던 92-93시즌, 닉 앤더슨은 평균 19득점, 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의 새로운 에이스인 오닐을 충실히 보좌하였습니다. 그리고 93년.....올랜도는 또다시 1라운드 1번 픽을 획득하며 크리스 웨버를 지명한 뒤, 1라운드 3번 픽으로 앤퍼니 하더웨이를 지명한 골든 스테이트와 트레이드를 단행하였습니다. 이로써 93-94시즌, 팀은 페니-샤크-앤더슨으로 이어지는 위력적인 삼각 편대를 구축하며 단숨에 동부에 강호로 발돋움하였고, 94-95시즌에는 그분이 컴백한 시카고를 무너뜨리고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달성하게 됩니다.(물론 당시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었던 올라주원과 조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드렉슬러에게 당하며 4연패로 우승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샤크와 페니의 등장으로 닉 앤더슨이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에이스에서 3공격 옵션으로 낮아졌지만 그는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충실히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100% 수행하였습니다. 93~94시즌부터 95-96시즌까지 닉 앤더슨은 평균 15득점, 5개의 리바운드, 4개의 어시스트 정도를 기록하며 공수에서 전혀 손색없는 플레이를 계속해서 보여주었습니다.

데뷔 이후 일곱시즌 동안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던 닉 앤더슨이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 것은 올랜도 매직이 몰락을 시작하는 96-97시즌부터입니다. 팀의 에이스였던 샤킬 오닐은 레이커스로 이적하였고, 오닐 이적 이후 팀의 중심이 될 것이라 기대했던 페니 하더웨이는 이 시점부터 부상을 달고 살며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앤더슨 역시 96-97시즌 , 데뷔 이후 최악인 평균 12.0득점을 기록하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97-98시즌에 평균 15.3득점으로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98-99시즌에도 평균 14.9득점을 기록하며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리빌딩을 선택한 팀 사정 상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는 올랜도를 떠나게 되지요. 99-00시즌을 새크라멘토에서 맞이한 앤더슨. 하지만 그는 평균 10.8득점에 40%미만의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하며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게 됩니다. 00-01시즌에는 부상으로 21경기에만 출장하였고요. 결국 01-02시즌 멤피스로 팀을 옮겨 15경기에 출장 평균 4.0득점을 기록한 뒤 은퇴를 하게 됩니다.

통산 성적은 13시즌 동안 800경기에 출장(선발 636경기), 평균 31.2분을 소화하며 필드골 성공률 44.6%, 3점슛 성공률 35.6%, 평균 14.4득점(11529득점), 5.1리바운드(4064리바운드), 2.6어시스트(2087어시스트), 1.4 스틸(1114 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1라운드 12번 Mookie Blaylock


8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2번으로 지명된 선수는 90년대 애틀랜타를 대표했던 185cm의 단신 포인트 가드인 무키 블레이락입니다.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2년간 플레이를 한 무키 블레이락은 2학년을 마친뒤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되지요. 오클라호마 대학 시절, NCAA 역사상 처음으로 2년 연속 200어시스트와 100스틸 이상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입니다. 대학 2년간 성적은 평균 18.1득점, 6.3 어시스트, 4.4 리바운드를 기록하였지요. 정확한 3점슛과 단신 가드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수비력까지 갖춘 매력 만점의 선수였습니다.

1라운드 12번 픽을 가지고 있었던 뉴저지는 가드 포지션 강화의 적임자로 그를 평가하여 지명하였습니다. 루키 시즌인 89-90시즌, 주로 백업 가드로 출장하며 평균 25.3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37.1%, 3점슛 성공률 22.5%, 평균 10.1득점, 4.2 어시스트, 2.8리바운드, 1.6 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두번째 시즌인 90-91시즌부터 주전 포인트 가드로 자리잡은 블레이락은 72경기에 출장, 평균 35.9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1.6%, 3점슛 설 15.4%, 평균 14.1득점, 6.1어시스트, 3.5리바운드, 2.4 스틸을 기록하며 팀의 주전 포인트 가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습니다. 다음 시즌에도 평균 13.8득점, 6.8 어시스트, 3.7 리바운드, 2.4 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92-93 시즌 직전....그는 애틀랜타로 트레이드되게 됩니다. 블레이락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지요.

애틀랜타에서 맞이한 첫 시즌인 92-93시즌, 그는 80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5.3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42.9%, 3점슛 성공률 37.5%, 평균 13.4득점, 8.4 어시스트, 3.5리바운드, 2.5 스틸을 기록하며 리그의 대표적인 포인트 가드로 성장하게 됩니다. 98-99시즌 애틀랜타에서 플레이하는 동안이 무키 블레이락의 커리어 기간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특히 94-95시즌~96-97 시즌까지 세시즌 동안 그는 각각 평균 17.2득점, 15.7득점, 17.4득점을 기록하며 단점으로 지적되곤 했던 득점력에서도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애틀랜타에서 플레이하는 동안 98-99시즌을 제외하면 매 시즌 2.5개 이상의 스틸을 기록하며 수비에서도 아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동시에 팀은 무톰보와 블레이락을 축으로 확실한 플옵 컨텐더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98-99시즌을 마지막으로 애틀랜타를 떠나 골든 스테이트로 팀을 옮기게 되면서 그의 행복했던 시간들도 끝나고 맙니다. 99-00시즌과 00-01시즌에는그래도 +10득점, +6.5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하며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01-02시즌에 부상으로 인해 35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고, 평균 3.4득점, 3.3어시스트, 0.7 스틸이라는 초라한 기록을 남긴채 13년 간의 커리어를 마감하게 됩니다.

무키 블레이락에 대한 기억 중 가장 크게 남아있는 것은 아주 정확한 3점슛을 경기 중에 많이 성공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인트 가드 중 정확한 외곽슛을 겸비한 선수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하지만 블레이락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수비력이었습니다. NBA에서 보낸 13시즌 중 그가 +2개의 스틸을 기록하지 못한 시즌은 루키 시즌과 커리어 마지막 해, 단 두 시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스틸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매치업 상대의 득점을 최소화 시킴과 동시에 상대팀의 포인트 가드를 압박하며 상대방의 공격을 출발에서부터 삐걱거리게 하였던 것은 블레이락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퍼스트팀이나 세컨드 팀, 서드 팀에는 선정된 적이 없지만, 그는 93-94시즌과 94-95시즌에 연속해서 NBA All-Defensive First Team에 선정되었고, 95-96시즌부터 98-99시즌까지는 네 시즌 연속 NBA All-Defensive Second Team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90-91시즌부터 00-01시즌까지 열시즌 연속 스틸 부분에서는 항상 리그 Top 10 내에 위치한 선수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커리어 13년 동안 그가 성공시킨 1283개의 3점슛은 역대 22위에 해당되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부상으로 생각보다 빨리 커리어를 마감한 선수이지만 강력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이전의 포인트 가드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플레이를 선보인 훌륭한 가드였습니다.(그러니까 미네소타는 푸 리차드슨도 리차드슨이지만 블레이락이나 하더웨이를 지명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다시 드네요.)

통산 성적은 889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4.9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40.9%, 3점슛 성공률 33.6%, 평균 13.5득점(11962득점), 6.7어시스트(5972어시스트), 4.1 리바운드(3659리바운드), 2.3 스틸(2075스틸)을 기록하였습니다.

참고로 90년대에 너바나와 함께 얼터너티브 락의 광풍을 주도했던 펄 잼의 최초 밴드명이 'Mookie Blaylock'아었다고 하네요....멤버들이 무키 블레이락의 광팬이어서 그랬답니다......

1라운드 14번 Tim Hardaway

89년 드래프티들 중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가능성이 가장 큰 선수 중 한명이지요. 텍사스 엘 파소 대학 시절 4년 간 평균 11.7득점, 4.0리바운드, 5.4 어시스트를 기록하였고, 8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4번으로 골든 스테이트에 지명되며 NBA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됩니다. 183cm의 단신 포인트 가드임에도 불구하고 경기당 20득점 정도의 득점을 해줄 수 있는 빼어난 득점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3점슛 이외에도 돌파와 포스트 업을 통한 득점에도 능했던 선수입니다. 특히 '킬러 크로스 오버'라고 불리울 정도의 압도적인 드리블 실력을 바탕으로 90년대 초반 골든 스테이트에서 크리스 멀린, 미치 리치몬드와 함께 TMC 트리오를 결성, 화려한 공격 농구의 진수를 보여준 선수이기도 하지요.

이 선수의 커리어에 대해서는 얼마전에 별도의 포스팅을 했었으니 참고로 하시면 될거에요.

http://kaga4467.egloos.com/1592261

통산 성적은 커리어 13년 동안, 867경기 출장(선발 770경기), 평균 35.3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43.1%, 3점슛 성공률 35.5%(4345개 시도 1542개 성공), 평균 17.7득점(15373득점), 8.2 어시스트(7095어시스트, 통산 12위), 3.3리바운드(2855리바운드), 1.6 스틸(1428스틸)을 기록하였고 커리어 13년 중 플옵에는 모두 열 차례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커리어 13년 동안 1542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는데 이것은 통산 7위에 해당되는 대기록이기도 합니다.

주요 수상 경력으로는 89-90시즌 NBA All-Rookie First Team에 선정되었고, 1번의 All-NBA First Team(1997), 3번의 All NBA Second Team(1992, 1998, 1999), 1번의 All-NBA Third Team(1993), 그리고 올스타에는 5번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드림팀 4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1라운드 16번 Shawn Kemp



케빈 가넷 등장 이전 고졸 선수로서 엄청난 임펙트를 준 선수.....바로 숀 켐프입니다. 물론 캠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트리니티 밸리 전문 대학에 입학했으나 대학 선수로서는 한 경기도 플레이를 한 적이 없습니다. 개인 연습만 했었고 덕분에 1989년 드래프트에서 캠프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가졌던 팀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라운드 16번으로 숀 캠프를 지명한 시애틀은 커다라 모험을 한 셈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시애틀은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을 하였습니다. 역대 파워 포워드들 중에서 최강의 운동 능력을 갖춘 이 무서운 얼굴의 선수는 89-90시즌부터 여덟시즌 동안 시애틀에서 플레이 하는 동안 당대 최고의 포인트 가드 중 한명인 게리 페이튼과 힘을 합쳐 시애틀을 리그의 강호로 성장시켰고, 95-96시즌에는 시애틀을 NBA 파이널로 인도하기까지 하였지요.(물론 조던의 시카고한테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루키 시즌인 89-90시즌 81경기에 주로 교체로 출장하며 평균 13.8분을 소화하였습니다. 필드골 성공률은 47.9%, 평균 6.5득점, 4.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출장 시간 대비 최고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1990년 드래프트에서 시애틀은 1라운드 2번 픽을 획득하였고, 공수 양면에서 최고의 기량을 갖춘 게리 페이튼을 지명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팀은 캠프와 페이튼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였지요. 90-91시즌부터 주전 파워 포워드 자리를 꿰찬 캠프는 81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30.1분을 소화, 필드골 성공률 50.8%, 평균 15.0득점, 8.4 리바운드 1.5 블락슛을 기록하며 A급 파워 포워드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 시즌에도 15.5득점, 10.4리바운드를 기록,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할 수 있는 선수가 되지요. 91-92시즌에도 계속 성장한 캠프는 15.5득점, 10.7리바운드 1.9 블락슛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팀은 이제 확실한 플옵 컨텐더로 서부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92-93시즌부터 96-97시즌까지(이 시즌부터 클리블랜드에서 플레이) 캠프는 다섯 시즌 연속 +17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칼말론, 찰스 바크리와 함께 NBA를 대표하는 파워포워드로 자리잡게 되지요. 물론 종합적인 완성도에서 본다면 바클리나 말론에 비해 캠프가 한 수 아래인 것은 사실이지만 캠프가 보여준 그 짐승과도 같은 운동 능력과 스피드, 파워는 말론과 바클리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았습니다.

캠프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파이널 진출에서 성공했던 95-96시즌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즌 캠프는 79경기에 출장하여 필드골 성공률 56.1%, 평균 19.6득점, 11.4리바운드, 1.6 블락슛으로 팀을 이끌었습니다.

96-97시즌까지 시애틀에서 플레이한 캠프는 97-98시즌 클리블랜드로 이적하게 됩니다. 전년도 시애틀에서 330만 달러의 연봉을 받았던 캠프는 클리블랜드로 이적하면서 두배가 넘는 860만불의 연봉을 받게 됩니다. 캠프는 클리블랜드에서 모두 세 시즌을 뛰었고, 이 세시즌 동안 평균 18득점, 20.5득점(커리어 하이), 17.8득점을 기록하며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캠프는 이 시절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네요. 득점력은 꾸준히 유지되었지만 리바운드는 9.3개, 9.2개, 8.8개로 계속 줄어들고 있었고, 특히 매 시즌 평균 4개 가까이 잡아주던 어펜스 리바운더의 갯수도 이 세시즌 동안은 2.7개, 3.1개, 2.8개로 확연히 그 수치가 낮아졌습니다. 또한 득점은 시애틀 시절에 비해 조금 나아진 것 처럼 보이지만 시애틀 시절 50%를 상회하던 필드골 성공률은 44.5%, 48.2%, 41.7%로 낮아지며 파워 포워드 포지션에서 상당히 낮은 슛 성공률을 보이는 선수로 전락하게 됩니다. 동시에 몸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시애틀 시절의 압도적인 운동 능력도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팀웍적인 측면에도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하였지요.

결국 00-01시즌, 캠프는 당시 올스타 군단의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중위권에서 헤매던 포틀랜드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의 샤프한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130kg이 훌쩍 넘는 체중으로 팀에 합류한 캠프는 00-01시즌 68경기에 주로 교체로 출장하며 평균 15.9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은 데뷔 이후 최악익 40.7%, 평균 6.5득점, 3.8리바운드를 기록하는데 그쳤고, 01-02시즌에도 평균 6.1득점, 3.8리바운드로 회복을 기미를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포틀랜드 입장에서 더욱 참담했던 것은 예전이 기량만을 보고 그에게 1000만달러가 넘는 연봉을 지불하였다는 것이지요. 00-01시즌 캠프의 연봉은 1078만 달러였고, 01-02시즌의 연봉은 1266만달러였습니다.)

결국 02-03시즌 올랜도로 옮긴 캠프는 여기서도 평균 6.8득점, 3.8리바운드를 기록하는데 그치며 유니폼을 벗게 되지요. 이후 개인 훈련 등을 실시하며 리그로의 컴백 의지를 몇번 보여주었습니다만 2006년에 약물 소지로 인해 체포당하며 결국 계약에 실패하게 되었고 이 압도적 운동 능력의 매력적인 파워 포워드는 쓸쓸히 커리어를 마감하였습니다.

통산 성적은 커리어 14시즌 동안, 1051경기에 출장, 평균 27.9분을 소화하였고, 필드골 성공률 48.8%, 평균 14.6득점(15347득점), 8.4 리바운드(8834리바운드), 1.2 블락슛(1279블락슛)입니다. 시애틀 시절의 포스를 계속해서 보여주었다면 이 선수는 역사상 위대한 파워 포워드들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을 것이고 명예의 전당까지도 노려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캠프는 자기 관리에 실패한 프로 스포츠 선수가 어떻게 망가지는 것을 몸소 보여주며 처참한 커리어 말년을 보낸 비참한 선수로 팬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주요 수상 경력으로는 93-94시즌, 94-95즌, 95-96시즌 All NBA Second Team 선정, 그리고 1994년 드림팀 2의 일원으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1라운드 26번 Vlade Divac


8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6번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레이커스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216cm의 장신 센터인 블레이드 디박을 지명하였습니다. 이것 또한 상당히 좋은 선택이었지요. 카림 압둘 자바와 샤킬 오닐 사이의 시기.....이 시기 동안 레이커스의 골밑을 든든히 지켜준 선수는 바로 디박이었습니다. 장신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훌륭한 패싱 센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포스트에서 외곽으로 볼을 빼주는 킥 아웃이 아주 훌륭했었던 선수였고, 장신을 이용한 수비와 매 경기 +10득점, +7리바운드 정도는 기록해줄 수 있는 성실한 센터 플레이어였습니다.

물론 아주 임펙트 있는 시즌을 보낸 적은 거의 없고 통산 성적에서도 눈에 띄는 부분은 별로 없지만 그가 포스트를 지키고 있는 동안 다른 팀원들이 편안하게 플레이할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능력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루키 시즌인 89-90시즌에는 82경기에 주로 교체로 출장하며 평균 19.6분, 필드골 성공률 49.9%, 평균 8.5득점, 6.2 리바운드를. 1,4 블락슛을 기록하며 All Rookie First Team에 선정되었습니다. 이후 95-96시즌까지 레이커스에서 플레이하며 평균 13득점에 8리바운드 정도를 꾸준히 기록하였습니다. 특히 94-95시즌에는 80경기에 출장하여 필드골 성공률 50.7%, 평균 16득점, 10.4리바운드, 4.1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요.

하지만 오닐의 등장과 함께 팀에서 자리를 상실한 디박은 96-97시즌과 97-98시즌 샬럿으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98-시즌부터 03-04시즌까지는 새크라멘토에서 플레이를 했지요. 이 기간 중 디박이 기록한 평균 득점은 대략 12득점 정도입니다. 리바운드는 대략 8개 정도 선이었고요, 어시스트는 거의 매시즌 +3개 정도를 기록해주며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04-05시즌, 다시 레이커스로 돌아와 15경기에 교체로 출장하였고 경기당 8.7분을 소화하며 평균 2.3득점, 2.1 리바운드를 기록하였고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게 됩니다.

통산 성적은 커리어 16시즌 동안 1134경기에 출장, 평균 29.8분을 소화하는 가운데, 필드골 성공률 49.5%, 평균 11.8득점(13398득점), 8.1리바운드(9326리바운드), 3.1 어서스트(3541어시스트), 1.1 스틸(1288스틸), 1.4 블락슛(1631블락슛)을 기록하였습니다.

센터 플레이어로서 통산 +3000어시스트, +1000스틸을 기록하였다는 점이 눈에 띄네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을 위해 플레이를 하였던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나는 기록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점프력이나 운동 능력이 없었지만 커리어 통산 블락슛이 1.4개라는 점도 훌륭한 기록이네요. 무엇보다 몸싸움이 심한 포스트에서 플레이를 하면서 커리어 통산 평균 턴 오버가 2.18개, 평균 파울 수가 3.2개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실책이 적고 파울 관리에도 능숙한 좋은 센터 플레이어였습니다......

만약 1라운드 6번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시카고가 스테이시 킹이 아니라 블레이드 디박을 지명하였다면.....과연 90년대의 불스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지네요......

하아~ 정말 기네요.....길어요.....여기까지 쓰는데 딱 3일 걸렸습니다.

그리고 89년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도 리그에 확실한 족적을 남긴 선수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바로 2라운드 9번, 전체 36번으로 지명된 클리포드 로빈슨이지요. 포틀랜드는 1라운드에서 22번 픽으로 Byron Irvin 이라는 가드를 지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선수는 단 세시즌 동안 커리어를 유지했을 뿐이고, 그나마 세 시즌 동안(포틀랜드에서 한 시즌, 워싱턴에서 두 시즌), 87경기에 출장하여 평균 5.2 득점, 1.4리바운드, 0.8 어시스트라는 재앙과 같은 성적을 남긴채 은퇴를 하였지요. 하지만 포틀랜드는 2라운드에서 클리포드 로빈슨이라는 장신 포워드를 지명하면서 89년 드래프트에서 좋은 선택을 한 팀 중 하나로 남게 됩니다.

클리포드 로빈슨의 통산 성적은 커리어 18시즌 동안 1380경기에 출장(선발 844경기), 평균 30.8분, 필드골 성공률 43.8%, 3점슛 성공률 35.6%, 평균 14.2득점(19591득점), 4.6 리바운드(6306리바운드), 2.2 어시스트(3094어시스트), 1.0 스틸(1402스틸), 1.0 블락슛(1390블락슛)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92-93시즌에 올해의 식스맨에 선정되었고, 99-00시즌과 01-02시즌에는 NBA All Defensive-Second Team에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은퇴를 선언한 시점에서 그가 기록한 커리어 통산 1253개의 3점슛을 성공시켜 이 부분 통산 랭킹 2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통산 42561분의 플레이 타임은 통산 13위, 통산 득점은 NBA 통산 36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며칠 전 이 선수에 대한 별도의 포스팅도 작성하였으니 자세한 내용은 참고로 하시면 될 것 같네요......

http://kaga4467.egloos.com/1603028

90년대 시카고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정확한 3점슛을 주무기로 하였던 B.J. 암스트롱도 보입니다만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던 선수도 아니었고 또 오픈 찬스에서의 정확한 3점슛을 제외하면 기량 면에서 특출난 면이 없었던 선수라고 생각하기에 구체적인 언급은 그냥 패스합니다.


89년 드래프트에 대한 포스팅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이제 1990년대로 넘어가는데 90년대 드래프트에 관한 글들은 조금 쉬었다가 다시 쓰도록 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예전에 활동했던 선수들에 관한 포스팅 정도만 작성해야겠다 싶습니다.(네...드래프트 관련 포스팅은 너무 길고 또 힘드네요......담배 하나 물어봅니다.....)



덧글

  • crdai 2009/08/27 21:39 # 답글

    Divac은 디박으로 읽어야 하는지 디바치로 읽어야 하는지 상당히 논쟁이 있었지요. 뭐 저는 원하는대로 읽으면 되지 않겠냐 라는 파였습니다만, 구 유고권의 이름인지라 디바치라고 읽는게 맞다고는 하더군요. 확실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이선수는 참 좋아하던 선수였지요. 개인적으로 원하는 센터의 전형이었던지라. 견실한 수비에 패싱, 그리고 경기를 파악하고 스크린을 거는 타이밍을 잘 잡았던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했던 그런 센터였던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아저씨가 샬럿으로 간게 당시 코흘리개 어린이(...)였던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1대 1 트레이드였지요 아마. 다들 레이커스가 미쳤나, 아무리 잠재력이 있다고 해도 지금 시대에 이런 견실한 센터를 쉽게 얻을수 있는게 아닐텐데...라는 이야기들이 자주 와갔었는데...그걸보면 NBA로고 영감님(...)이 안목은 확실히 탁월한듯. 그 어린이가 이런 괴물이 될지 그당시 아무도 몰랐지요 네..;;

    여하튼 오늘도 잘 봤습니다. 뭐랄가 그리움이 아주 홍수처럼 밀려오네요.
  • 울프우드 2009/08/28 00:51 #

    crdai님 반갑습니다.....

    디바치냐 디박이냐 가지고 참 말이 많았죠.....디바치가 많다고 하지만 그냥 어린 시절 디박이라 부르고 다녔던 기억이 있어 그냥 디박으로 표기했습니다......

    당시 코비 브라이언트는 고졸이었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었지요. 코비가 드래프트된 것이 1996년....그리고 레이커스가 샤킬을 영입한 시점도 96-97시즌 전이었지요......

    아무래도 레이커스 입장에서는 디박을 보내서 샐러리도 확보하고(95-96시즌 디박의 당시 연봉은 330만불 정도였네요.....) 샤킬과의 포지션이 겹치는 부분도 함께 해결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샬럿의 입장에서는 모닝의 빈자리를 메워줄 수 있는 빅맨이 필요했고 슈팅 가드와 스몰 포워드를 함께 보면서 당시 엄청난 득점 감각을 보여주고 있었던 글렌 라이스가 있었으니 굳이 코비를 잡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고요......

    코비가 워낙에 대박을 쳐서 그렇지 샬럿에서의 두시즌 동안 디박도 괜찮은 플레이를 펼쳤으니 양쪽 모두 그리 손해는 아니었을 수도(물론 당시에는이라는 단서가 붙어야겠지요......)

    부족한 글 잘 읽어주셨다니 감사하고 저도 기분이 좋네요^^
  • crdai 2009/08/28 06:14 #

    아니 뭐랄까...샤크의 영입으로 인해 디바치의 트레이드는 당연히 예상된거니 별 문제는 없는데..단지 그 당시의 가치문제였지요. 아무리 뛰어난 원석이라고는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루키와 리그에서 결과를 내어놓고 한창 전성기에 다가서는 올스타급 센터를 무려 1대1로 바꾼다는 사실이 믿어지질 않았다라고 할까요. 뭐 결과는 지금의 현실이 말해주고는 있습니다만 그당시의 상황으로는 디바치의 가치가 너무나 평가절하되어버린듯한 느낌의 트레이드였기에 아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디바치 자신도 굉장히 서러워했었지요.

    그나저나 디바치의 영상 앞부분에 나오는 사람이 누군가 했더니 크리스 웨버군요. 허어...하긴 저시절 새크라멘토가 좀 쎄긴 쎘죠. 각설탕군이 좀더 안정적이기만 했더라면 아주 이상적인 팀이 될수 있었던거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참 안타깝기 그지없군요. 허어..

    그리고 16위로 다나 배로스도 보이네요. 뛰어난 3점슛을 가진 좋은 포인트 가드였지만 역시 부상때문에 딱 한해 반짝 하고 나머지는 그럭저럭인 선수가 되어버린 안타까운 선수. 그래도 올스타도 한번 나갔으니 나름 성공한 선수였다고도 할수 있을듯.
  • 울프우드 2009/08/28 12:17 #

    디박과 코비의 트레이드는 당시 디박 본인에게나 혹은 팬들에게나 많은 아쉬움이 남는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어쩔수 없는 부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샬럿 시절을 지나 새크라멘토로 옮겼을때 당시 새크라멘토도 강팀이었기에 쩝........

    Dana Barros는 180cm의 단신 포인트 가드였죠. 님 말씀대로 상당히 3점슛이 정확한 선수였습니다. 커리어 14시즌 동안 3점슛 성공률 41.1%에 달하네요(2652개 시도 1090개 성공).

    데뷔 시즌 이후 네 시즌 동안 시애틀에서는 백업 가드로 주로 활약핟가 93-94시즌 필라델피아로 옮기면서 꽃을 피운 선수였지요. 특히 94-95시즌에는 자신의 커리어 기간 동안 유일하게 전 경기에 출장하며 평균 20.6득점, 7.5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올스타급 활약을 펼쳤지만......95-96시즌, 보스턴으로 옮기면서 다시 백업 갇.....그리고 96-97시즌의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 종료시까지 평균 20분 내외에 대략 8득점, 3어시스트 정도를 기록한 선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좀더 훌륭한 커리어를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저도 한번씩 해본답니다.....^^
  • 바른손 2009/09/01 17:13 # 답글

    헉 이번 글은 제가 놓쳤네요.
    일단 선리플 후정독 해야겠습니다.
    엄청난 스크롤인데 좋은 글 쓰시느라 고생하셨겠습니다.
  • 울프우드 2009/09/01 17:20 #

    쓰다보니 내용이 길어져서 스크롤 압박이....^^
댓글 입력 영역



통계 위젯 (블랙)

07
29
271866